데살로니가전서
2010.07.26 09:45

(7강) 동일한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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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3-16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213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설교>

목사가 교인들에게 많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설교를 듣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본문으로 13절의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는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목사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말씀이 신자에게 역사하여 큰 능력을 이루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13절의 말씀 그대로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바울이 하는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역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을 곡해함으로써 목사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역하면 안되고 무조건 받고 순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교회의 폐해는 참으로 심각하다 할 정도입니다.

 

 

본문은 목사의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목사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가 하는 말이라고 해도 복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안받고는 설교를 듣는 사람의 판단에 달린 문제가 됩니다. ‘내가 들어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판단되면 받겠다’는 식이 됩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까? 그러면 어떤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까? 제 설교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이고, 반감을 가지지 않고 옳다고 하며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까?

 

 

그런데 반감을 갖든 복음으로 인정을 하든 그것은 자기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제 설교를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인간의 판단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에게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즉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사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고, 또 말미에서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여러 가지 요소가 개입됩니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나 수준, 자신과의 관계 등등 많은 요소가 개입되어서 누구의 말은 듣고 누구의 말은 듣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지혜에 놀랐으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예수님의 신분이나 출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대단한 집안의 출신이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시골 작은 교회의 볼품없이 보이는 목사의 말보다는 도시의 큰 대형교회의 유명한 신학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받지 않고는 개인의 결단과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을 두고 그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받음을 유대에 있는 교회가 받았던 동일한 고난으로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동족으로부터의 고난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상상할 수 없는 핍박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민족으로부터 단절되는 일이고, 고난과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이 예상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죄를 깨닫게 되고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한 메시아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믿음에 붙들리는 것이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 예상된다고 해도 믿음의 길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순종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 의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였고, 말씀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이러한 믿음의 역사, 순종은 끊어지지 않고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교회와 동일하게 동족들로부터 받는 고난의 길을 갑니다. 사도는 이것을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언급하는 ‘본받음’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본받아 실천하는 의미라기보다는 동일한 말씀의 역사와 동일한 믿음 아래서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신자라면 같은 믿음의 모습이 나오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십자가에 죽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은 믿음의 길이었고 성령이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믿음의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에서의 편안과 복을 이뤄주는 것이 믿음의 일이고, 또 믿음의 인도일까요? 하지만 과연 성경에 누가 그러한 믿음의 인도를 받았습니까? 사도들 중 누가 그러한 인도를 받았습니까?

 

 

예수님도, 사도도 전혀 가지 않은 믿음의 길을 우리가 간다면 그것은 사도들의 믿음과 다르다고 해야 합니다. 즉 사도와 동일한 믿음이라면 사도가 간 고난과 동일한 고난의 본받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사도에게 역사했던 말씀과 동일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 교회와 동일한 믿음이 역사함으로 인해서 동족에게 고난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게 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사람의 말로 받은 것이라면 자신에게 고난이 되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 그 길로 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면 말씀의 역사로 인해서 육신에 이로운 길보다는 영혼이 사는 생명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목사의 설교를 복음으로 인정하고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개인적 생각과 판단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에게는 말씀이 역사하게 되고, 말씀의 역사는 신자로 하여금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고난과 핍박의 길이라고 해도 영혼이 사는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역사함으로써 신자는 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사랑이 능력이 되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유대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했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유대 교회와 동일한 고난의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동일한 주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좁은 길도, 고난의 길도 기꺼이 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동일한 말씀의 역사 아래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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