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8.02 19:17

(8강) 사도의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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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7-20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217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설교>

신자들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하늘나라에 가서 면류관을 받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이 마무리 된다고 생각합니다. 딤후 4:7,8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하늘나라에서의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소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소망한 의의 면류관은 머리에 씌워지는 뭔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강림하시게 되면 예수님의 백성들은 영원토록 예수님과 영원한 의와 생명의 관계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으로 표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미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신자에게는 장차 받을 영광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8,19절)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소문을 퍼지게 함으로써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사도의 업적이 부각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가 데살로니가를 세웠고 사도의 열심과 가르침으로 인해서 교회가 믿음의 소문이 퍼진 것이라면 바울의 업적은 자랑할 만합니다.

 

 

‘바울이 했다’는 것은 바울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단 한시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자신이 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만큼 키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위해 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사도에게는 큰 기쁨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선 그들이 하나님이 바울을 세워 역사하셨다는 것과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진심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에게서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나올 수 없고, 탐심의 탈을 쓴 말 역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도의 이런 마음은 빌 4:1절의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동일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사도의 사랑은 특정 지역과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의 사랑은 사람을 바라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선택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속한 자라는 동일한 관계 안에서 나타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심정이기 때문에 사도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해주는 것에 마음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선 데살로니가 교인은 이미 그것으로 바울에게 기쁨이요 소망이며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따로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도의 마음 앞에 목사인 저로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동안 목사로서 봉사해 왔다는 말도 감히 할 수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동일한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목사는 신자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신자는 목사에게서 그리고 다른 성도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사랑을 받음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합니다. 그런데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목사가 사랑이 없다고 하고, 교회가 사랑이 없다면서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를 보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받고 싶은 것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사도에게 예비되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고 사랑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신자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은 세상 누구로부터도 받을 수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또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처럼 존귀한 것을 받은 신자라면 사람에게서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들 그 사랑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겠습니까? 또한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이겠습니까? 수시로 변하고 변덕을 부리는 것이 인간의 사랑인데, 그런 사랑을 고대하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대한다고 해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으로 주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주어진 신자에게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도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주는 것도 기뻐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있었다면 바울은 일찌감치 죽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일까요?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신의 결단과 의지를 믿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는 자기감정, 자기 사랑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20:35절에 보면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까? 받는 것보다 주는 행위가 더 신앙적이고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윤리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받은 것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바울이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고자 했던 것은 그에게는 받아서 넘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에서나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을 내어 놓는 일에만 힘을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줄 수 없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히 복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준다는 선한 행위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받은 것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로부터 받고자 하는 탐심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도 사도는 이미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받은 그것으로 기뻐했기에 교회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도에게 데살로니가 교인은 기쁨과 소망과 면류관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처럼 신자는 서로에게 기쁨과 소망과 면류관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과 용서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관계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17,1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고 말합니다.

 

 

사탄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가는 것을 왜 막았겠습니까? 이미 복음이 전해졌는데 사도를 막는다고 해서 전해진 복음이 없어지기라도 하겠습니까? 사탄이 바울을 막는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의 관계로 세워져 가는 것을 훼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탄의 이런 훼방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인간관계로만 만나게 하면서 한 몸의 관계를 훼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를 보게 되면 우리가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함께 천국으로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한 몸으로써 주님을 나타내고 자랑하면서 재림을 기다리며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관계입니다. 내가 연약해지고 흔들릴 때면 다른 형제의 믿음을 보면서 그에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고, 나에게도 함께 하시고 역사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서로의 믿음을 돕는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에게 기쁨이고 소망이며 자랑의 면류관이 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은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서 형제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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