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8.16 16:06

(10강) 감사로 하는 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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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3:9-10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309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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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신자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오직 생명으로만 바라볼 뿐이지 세상에서의 삶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부분은 지금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선의 은혜로 받기 때문에 주어진 것 밖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끊임없이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이 곧 죽음의 흔적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의 흔적을 보는 신자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해 절박한 심정이 있게 되는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복음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신자가 복음에만 집중을 하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신자는 복음이 개입된 관계에 있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이 개입되고 복음이 중심된 관계에서는 서로 원하는 것도 인간적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환난이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위에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위해 다른 교회처럼 헌금을 모아 주기를 원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때문에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가 교회로 인해 염려하고 그들에게 가지 못한 것으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이제는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문제를 얼마나 크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에게는 교인의 수가 늘고 큰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의 소문이 퍼진 것으로 큰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사도가 교회에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사도를 기준으로 해서 현대 교회의 목사와 교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복음이 상실된, 다만 인간적 관계만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교인에게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합니다. 목사인 자신을 섬기고 잘 대접해주기를 기대하고, 장로 집사 권사를 세울 때는 마치 자신이 그런 직분을 주는 것처럼 목사에게 선물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교인 또한 목사에게서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합니다. 즉 목사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와 교인은 서로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뿐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 그런 관계가 가능한 것은 목사도 교인도 복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복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충돌은 피할 수가 없고, 그러한 충돌은 인간적 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복음이 개입된 관계만이 교회의 참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복음이 개입되고 복음이 중심되어 있는 관계에서 사도는 교회의 믿음에 대한 소식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기쁨을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교회의 믿음으로 인한 기쁨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표현합니다. 모든 기쁨이라는 것은 기쁨이란 기쁨은 모두 모아 놓은 것 같은 큰 기쁨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꾼의 위치에 있었던 사도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복음의 일꾼이 받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고난이 어떠했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큰 고난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큰 고난이었습니다.

 

 

복음의 일꾼이기 때문에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은 오히려 그를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와는 다른 길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가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갔던 사도에게 주어진 보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굳게 서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의 마음이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기쁨이며 보상입니다.

 

 

사도는 교회의 믿음으로 인한 기쁨을 하나님이 주신 보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보상이라면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는데 사도는 하나님께 대한 보답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선 것을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한 결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가 복음을 전한 자신의 공로를 생각했다면 비록 그가 교회의 믿음으로 기뻐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업적에 대한 기쁨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보답하는 얘기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선 것을 자신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했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자신은 사람의 말로 전했을 뿐인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에 자신은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교회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을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 감사 말고는 없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피조물이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무엇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보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시 50:8-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감사를 이유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0절의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을 보면 교회를 향한 사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기에 교회의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고, 그 기쁨 또한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여기며 감사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교제하고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다면 우리는 형제의 믿음을 염려하면서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에 굳게 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신자는 사도가 누린 모든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누려야 하는 하늘의 복은 이런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알기에 ‘어떤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의 신자의 교제와 위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귀한 복입니다.

신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알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어떠함을 알게 된다면 같은 사랑에 거하는 형제와의 관계는 인간적 관계를 뛰어 넘어서 복음이 개입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염려하고, 형제의 믿음이 내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하늘의 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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