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8.23 10:01

(11강) 사도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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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3:11-13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311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설교>

한국교회의 신앙은 열광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광적이라는 것은 찬송이나 전도 등에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정말 열광적입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밤새 목이 터져라고 두 손을 들고 ‘주여’를 외치며 기도하는 것은 보통이고, 교회적으로도 새벽기도회를 시작해서 철야기도회 그리고 교회 내의 여러 모임들도 개별적으로 기도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이러한 열정은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 열정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무엇이 기도인가를 모른 채 기도에 열중하게 되면 결국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신앙의 증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현대인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기도는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담기 위해 신의 힘을 빌리는 용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만 드러납니다. 오직 나와 내 가정,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는 진정성이 결여된 기도일 뿐입니다.

 

 

본문은 사도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사도의 기도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열광적으로 기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의 기도는 열광적이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내용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를 열광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도, 길게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를 어떻게 얼마나 오래 하느냐에 매인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를 벗어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라거나 얼마나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사도는 주야로 심히 간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뭔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보충한다는 것은 더욱 풍성한 믿음이 되게 해서 믿음의 부요를 누리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주야로 심히 간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믿음을 보충하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 주야로 심히 간구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까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오직 그들의 믿음의 풍성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은 믿음이 전부였습니다. 교회가 믿음이 풍성해져서 그리스도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울이 원하는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랑입니다.

 

 

어떻습니까? 교회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은 사도의 마음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들에게 과연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는 합니까? 혹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거나,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닙니까?

 

 

사도의 그 같은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믿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도의 인생에게 가장 존귀한 분은 그리스도로 자리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피는 생명으로 다가오게 되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세상 그 어떤 것도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도의 모든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관심으로 교회를 본다면 교회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의 풍성함이라는 간절함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을 향한 우리의 간절함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한 분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우리 믿음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요? 교회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사도의 마음을 엿보면서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고자 원했지만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2:18)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단이 그 길을 막음으로 가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한번 두번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계속 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을 내세우는 고집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자칫 안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까 한두 번 해보고 안되면 그만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물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될 때까지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도의 길을 사단이 막았다고 하지만 사단도 결국 하나님의 허용 아래 활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데살로니가로 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모든 길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이 오고 가는 길도 모두 하나님께 달렸다는 고백이 담긴 기도인 것입니다.

 

 

사도는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교회가 사랑이 충만하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또 기도합니다.

 

 

특별히 어떤 문제로 인하여 교인들의 관계가 멀어지고 불화가 생기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즉 사도의 사랑과 동일한 사랑이 넘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는 2:8절의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에 하나님의 복음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이 사랑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주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직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주기를 기뻐했고, 자기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사도를 주의 사랑으로 풍성하게 만들었고, 사도는 교회가 주의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아 넘치게 되는 것은 인간적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가 말하는 사랑이 단지 친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노력으로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주의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따지지 않으시고 덮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아무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신자가 이 사랑을 알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면 주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사랑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끝까지 증거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는가를 증거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에 파묻힐수록 사랑이 넘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아버지 앞에 흠 없는 거룩한 자로 서게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일입니다. 즉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미 흠 없는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세계에 들어간 것인데 굳이 기도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흠 없는 자로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교회가 예수님이 강림하실 그날까지 십자가를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과 시련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사도의 간절함의 중심에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대한 개인적인 마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에게 교회는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답게 존재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우리가 주일이면 만나고 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풍성해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다스림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도 사랑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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