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8.30 15:46

(12강)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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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4:1-8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4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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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설교>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에 대해서 사도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도에게 기쁨이었고 위로였으며 면류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믿음이라면 삶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과연 믿음이 있는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 등장합니다. 왜 이런 교회를 사도가 그토록 칭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도가 디모데를 통해 들은 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3절의 말씀대로 음란이었습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말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음란이 성행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의 음란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몇몇 개인의 문제였다면 교회를 향해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그처럼 음란이 교회적인 문제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까? 이것만 봐도 믿음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도덕적인 삶을 배경으로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결코 칭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음란을 정당화하거나 행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도는 음란을 버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음란을 행하지 않는 것이 의로움이고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음란을 버림으로써 거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각처에 믿음의 소문이 퍼질 정도의 교회에서 음란이 성행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음란은 도덕적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교회에서 성행했다면 그 교회는 참으로 문란했다는 증거인데, 그러한 교회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성행한 음란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음란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음란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녀 간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음란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음란을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1:9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접하기 전에는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이었고, 당시 우상을 섬기던 의식에는 음행이 수반되었으며, 결혼하지 않은 여인과의 음행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 당시 이방인의 사회적 분위기였음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들에게 음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음란이 자연스러운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음란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음란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음란이라는 행위를 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 곧 믿음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란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음란을 행하지 않는 것이 신자와 세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는 교회가 음란이라는 행위를 버리지 못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기 보다는 신자는 세상에서 벗어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풍습을 따르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말은 음란을 행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할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렘 10: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 즉 이방 나라의 길을 배워서는 안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방 나라의 길을 배우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방 나라의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방 나라의 길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거룩입니다.

 

 

당시 음란은 그들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고 그것이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즐거움이 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이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룩의 길을 가는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구별을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사도가 교회에 보여준 것은 자기 영광과 자기 즐거움, 그리고 자기 이름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고 매 맞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옥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를 아는 사람들이 사도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교회가 힘써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라는 것이고, 사도가 본을 보인 것 역시 바로 그것임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서 복음을 받고 그 복음을 믿는 교회라면 사도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가기를 힘써야 하고, 그것이 세상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음란을 버리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는 길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됨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4-6절을 보면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고 말합니다.

 

 

남편이 색욕을 따라 음란을 행한다면 그것은 아내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일이며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즉 한 여자의 남편으로써 아내만을 사랑하는 것이 남편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고 형제, 즉 아내를 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기 즐거움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가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분수를 앎으로써 색욕을 쫓지 않고 한 아내에게만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세상의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하나님의 당연한 보응을 아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보응은 심판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분수에 비하면 넘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는 지금의 것으로도 감사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고 많은 것을 취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결국 형제를 해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거룩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면서 거부할 수 있는 신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즐거움을 위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음란을 버리지 못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거룩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길이 곧 부정한 길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상관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이 가는 길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복음을 전한 사도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들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을 보면서 세상이 가는 길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거룩함이며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거부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임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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