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9.06 08:37

(13강) 형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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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4:9-12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409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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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설교>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로부터 믿음에 있어서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했기에 그런 칭찬을 받는가?’에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받은 칭찬이 뭔가를 실천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말하면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선교를 했다든지 구제를 했다든지 아니면 사회사업을 했다는 내용들이 없습니다. 단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음을 언급할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믿음을 칭찬함에 있어서 실천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형편과 환경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 일도 형편과 환경에 따라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넣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헌금의 액수를 생각하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과부와 부자의 형편을 생각하면 부자의 헌금보다는 과부의 헌금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 두 렙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과부에게는 생활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환경에도 형편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미암아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이 아니라 형제 사랑에 있어서도 사도가 더 이상 쓸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사도가 쓸 것이 없다고 할 정도라면 대단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어떻게 형제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였을까요?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사랑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즉 내 교회 안에 국한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모든 형제라면 마게도냐 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고후 8:1-5절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을 언급합니다. 물론 다른 교회를 위해 얼마든지 헌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풍성히 한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에 있던 빌립보 교회와 더불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일컫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했다면,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행한 사랑 역시 환난과 시련, 그리고 극심한 가난이라는 자기 형편과 환경을 초월한 사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형편과 환경을 초월해서 돕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한계입니다. 때문에 단지 이웃을 돕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의 구별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기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매여 사는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환난과 시련, 그리고 극심한 가난이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믿음의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현재를 바라본다면 환난과 시련 그리고 가난은 절망과 낙심의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환경적인 것은 잠시 동안의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을 넘어서 어려운 형제를 도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보다는 나의 환경과 형편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환경과 형편이 좋아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믿음의 문제는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을 돕는 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주신 이유는 거룩, 즉 구별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차별은 환경과 형편의 차별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차별이고, 가치관의 차별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러한 차별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과 똑같이 땅의 것으로 차별을 누리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기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주에 속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으로 가르침을 받은 신자는 자신을 넘어서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인데 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궁핍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른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이기에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자기 일을 하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로 삽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에서 손을 놓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을 힘써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형제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성령을 주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는 것이 혹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형제 사랑은 환경과 형편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앞세우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를 사랑할 의도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의도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언급한 것은 자기 형편과 환경에 맞게 사랑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만족을 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에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시고,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채워지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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