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5.09 19:51

(60강) 감각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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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7-2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1724(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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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설교>

사도는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방인 중에도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방인 모두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규정하고 그들처럼 행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논리와 합리적인 사고로 살아갑니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며 나름 선한 삶을 위해 힘을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도 오히려 기독교인보다 나은 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묵살 한 채 이방인 자체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은 누군가가 최고의 윤리와 도덕을 실천한다고 해도 역시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18절에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떠나 있다면 그의 끝도 역시 생명과 상관이 없습니다. 최고의 윤리와 도덕을 실천한 행함조차도 그의 끝을 생명으로 돌려놓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에서 떠나 있는 마음 자체가 허망한 것이고, 그 마음으로 행한 모든 것 역시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막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보다 더 뛰어난 은총은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잠시 동안 누릴 행복과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평강에 머물게 할 생명만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바라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방향이 생명으로 확고하게 세워져 있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흔들림에서도 오직 그 방향으로만 달려갈 것이고 약속되어진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이기에 이방인과 달리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방인의 삶의 특징이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 외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19절에서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말합니다. 감각이 없는 자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 채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이방인의 삶을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한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 그것은 단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일 뿐입니다.

 

 

우리는 ‘방탕’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도박, 술, 여자 등등의 문란한 삶을 연상합니다. 거기에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는 것을 더하면 비리, 사기 등등의 범죄를 더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방탕과 더러운 욕심이라는 단어만으로 상종할 수 없는 악한 인간상을 그려내게 되고 자연히 ‘나는 그렇게는 살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에 대해서는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판결을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즉 죄인이긴 하지만 방탕하지도 않았고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방탕’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은 아마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 밑에 있기를 싫어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하여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모두 날리게 됩니다. 이때 작은 아들이 허랑방탕했다는 것을 앞서 말한 것처럼 도박, 술, 여자 등의 문제로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방탕은 낭비의 의미가 있습니다. 헛된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방탕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방탕은 생명에서 떠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에서 떠나게 되면 모든 삶의 방향은 자신에게로 집중됩니다. 자신의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이 목적이 된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고자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지시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 아버지 집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인생을 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나 감각이 없는 자로 허랑방탕하게 살았고 이방인의 허망한 마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결국 재산을 모두 허비하고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워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을 때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도 양식이 풍족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달라진 것은 예전처럼 아들 대접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비록 품꾼으로 산다 해도 아버지의 집이 좋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감각이 있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각이 없을 때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거한다는 것이 큰 은총임을 몰랐습니다. 돈만 있으면 아버지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원하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유산으로 건전하게 살았다고 해도 방탕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 자체가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가볍게 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도서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입니다. 이것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광과 부를 누린 솔로몬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전 12:1,2절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으로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채 자기 행복을 찾는 방탕의 삶의 길로 부지런히 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면서 이방인처럼 행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감각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감각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육적인 일, 즉 이방인이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분명히 새겨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으면 그가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이것이 그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립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진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그 피를 우리에게 쏟으심으로 저주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잠시 잠깐 동안 나그네처럼 머물다 떠날 세상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자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에 속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거기에는 여러분의 일은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에 마음을 집중한다면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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