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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8 09:10

(58강) 요나의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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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27-32http://onlycross.net/videos/nuk/nuk-11273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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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설교>

 

◉ 예수님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 ◉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을 때 그 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일로 치부하고, 어떤 사람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과 말씀이 있은 후에 한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며 외칩니다. 이 말은 ‘당신 같은 분을 낳아 기른 당신의 모친이 복이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여인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훌륭한 말씀을 하는 예수님을 대단하게 여기며 그런 아들을 둔 예수의 모친을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나도 저런 아들을 가져봤으면’라는 부러움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식을 둔 여인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심으로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이 있다고 말하려면 훌륭한 말을 하고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에 대한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을 세우시는 것이고 참된 복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인가의 여부는 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로 행한다면 복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기준은 분명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여전히 옛 시각과 기준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십일조, 기도, 봉사, 구제, 이러한 실천적 의미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달라져 있고 달라진 그 사고가 어떤 모습으로 삶에서 나타나는 가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신앙적 행동이 특출하다 해도 그의 생각이 옛 사람의 생각 그대로라면 그는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고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가령 신앙적 행동이 바리새인을 방불할 정도로 특출하다고 해도 그가 세상적 기준에 의한 잘남과 못남의 차별적 시각으로 타인을 대하고, 세상의 것을 가지고 못 가진 것으로 복의 여부를 판단하고 가진 것을 복 있는 것으로 여기며 부러워한다면 그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23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된 것이 복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인생에 기적이 아닌 것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이 말하는 잘나고 못난 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곧 타인에 대해서도 세상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기준에 의해서 기존의 기준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키고 행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것이 무너지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자기 기준을 고집한 요나 ◉

 

요나의 표적은 이 내용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요나의 표적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살아난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시는 그 말씀의 세계에는 깊이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의도를 깨달아 알고 예수님의 그 마음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기존의 자신이 무너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고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배를 탑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하자 이 재앙의 원인이 누구 때문인지 가리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게 되고 제비가 뽑힌 요나는 바다에 던져서 큰물고기에게 삼키게 됩니다.

 

 

요나는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은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고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니느웨가 회개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의 행적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동안 갇혀 있던 것을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 생각하게 되면 결국 ‘삼일’이라는 숫자만을 십자가로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기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나의 표적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살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주셔서 그늘이 지게하고 요나는 그것으로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벌레로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시고 요나는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죽는 것이 났다며 불평을 토로합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요나서가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요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심판의 기준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는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져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존재들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런 생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정당성입니다.

 

◉ 자기 정당성에 의한 차별 ◉

 

우리도 늘 요나처럼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 채 타인을 대하게 됩니다. 자신을 옳음을 포기 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심판 받을 이유가 된다는 것이 요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받을만한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까? 아니면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벌레만도 못한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분명 후자가 맞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정당성이나 자기 옳음은 모두 포기된 자로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라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조건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타인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민족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그 외의 모든 민족은 이방인으로 간주하시며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라는 것이 요나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성을 조건으로 삼아 확인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나타나는 차별이나 판단 역시 요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신자로 인정하실 것이다’라는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곧 요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판단과 차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 타인을 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예수님을 정당하지 않게 바라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일을 바알세불의 힘으로 치부함으로써 자신들과 예수님의 차별을 고집하려는 것입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놀라운 표적을 메시아의 정당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메시아다움의 여부를 그의 말씀과 하시는 일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의 행함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을 복이 있다고 하는 여인도 복에 대한 시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의 아들이 대단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면 이 여인은 자신을 복이 있다고 자랑하며 자기 아들보다 못한 아들을 둔 여인들을 차별하게 될 것입니다.

 

 

즉 대단한 아들을 두게 된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며 그 복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마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에 그러한 복을 받은 것처럼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한 요나의 표적의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남방여왕과 니느웨 사람 ◉

 

31절에 보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하고, 32절에서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대의 사람이 왜 악한 세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가를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가 크다는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 스바여왕은 솔로몬에게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였으나 솔로몬이 묻는 말에 다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지혜를 높이며 하나님을 송축하게 됩니다. 부유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누리는 복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또한 니느웨는 강대국의 수도였지만 요나로 말미암아 전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여 회개하게 됩니다. 이들은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니느웨처럼 부요한 성이라면 요나의 말은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을 누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면 니느웨 또한 지금의 세대가 왜 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을 솔로몬의 지혜에 굴복한 스바 여왕과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여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크시고 요나보다 크신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옳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당성만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차별화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악한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서 요나를 정죄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늘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구축한 정당성을 무너뜨리시고 대신 그 자리에 죽는 것이 마땅한 초라한 나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의 모든 바탕에 예수님의 용서가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세계에는 ‘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 같은 자를 붙드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만 높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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