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5.05 09:31

(59강) 등불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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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33-36http://onlycross.net/videos/nuk/nuk-11333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 표적을 좇는 세대 ◉

 

여러분은 어떤 표적을 보고 싶으십니까? 어떤 표적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아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는 일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같은 표적 보기를 원하고 표적이 있다는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세대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곧 악한 세대라면 지금 역시 표적을 구한다면 예수님에게 악한 세대라는 판단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믿음의 증거를 병 고침과 소원 성취 같은 표적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세대가 곧 악한 세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과 예수님이 보이고자 하신 표적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악한 세대가 구했던 표적은 세상 전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능력의 일이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은 그 같은 능력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요나의 표적을 요나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니느웨의 굴복, 즉 회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외침, 즉 전도로 인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니느웨는 강대국인 앗수르의 수도로서 부족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부요한 성입니다. 그러한 성이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 회개를 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니느웨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체험했다면 회개했을까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다면 회개했을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니느웨를 회개하게 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야말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솔로몬의 지혜에 굴복한 남방 여왕과 하나님의 심판의 외침에 굴복하고 회개한 니느웨가 심판 때에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별 것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세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원합니다. 기적을 체험했다는 간증을 들으면 아멘하면서 자신도 기적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남방여왕이고 니느웨라는 것입니다. 결국 기적을 체험하기만 하면 믿음의 능력이 있는 것이고 굉장한 신자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을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다’는 정죄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유일한 표적은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고 나오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죄의 자리임을 보게 하시고 평소에 괜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자신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인으로 보게 되는 이것이 참된 기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악인으로 보게 되는 것을 눈이 밝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 성한 눈 나쁜 눈 ◉

 

본문의 등불 이야기는 이러한 요나의 표적 이야기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33절)는 구절을 보면 등불은 집을 환히 비춤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자로 하여금 빛을 보게 하기 위한 용도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등불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등장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5:15절과 6:22절에서 등불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5:15절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는 내용으로 등불의 역할이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 안 모든 사람’은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성경임을 생각해 보면 율법 아래에서 자신의 행함을 의로 여기는 어둠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 받음을 믿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등불의 역할임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6:22절의 등불 이야기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보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마음 또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참된 보물을 보물로 여기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이 곧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보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 눈은 성한 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마음 또한 어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세상의 재물은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재물에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재물에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기독교인들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여전히 복이라는 명목으로 재물을 추구할까요? 그것은 눈이 성치 못하여 참된 보물을 보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보물이고 그 보물로 인해서 마음이 변화되어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게 된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밝아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관심의 중심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재물이라는 세상의 복보다는 복음이라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마태복음에서 이해되는 등불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등불 이야기도 마태복음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마태복음에서는 둘로 나누어져 있는 등불 이야기로 하나로 결합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등불’이지만 누가는 ‘들어가는 자들을 비추는 등불’로 이야기 하는 점이 다른데 이것은 누가가 데오빌로, 즉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가의 문제가 등불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본문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표적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무엇을 참된 표적으로 바라보느냐로 눈의 성함과 나쁨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 밝은 몸 어두운 몸 ◉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교회를 나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부인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자신을 무너져야 할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소원을 담은 기도를 응답해 주는 예수가 반가운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하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믿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말이 복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34절을 보면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고 말합니다. 몸의 등불이 눈이라는 것은 눈이 스스로 빛을 비췬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취는 등불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외부에서 비취는 등불의 빛이라 함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과 말씀은 하나같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합니다. 따라서 눈이 성하다면 예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성하지 못하다면 예수님의 행하심을 오히려 자기 욕망을 채울 구실로 이용하려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으니 지금도 우리의 병을 고쳐주신다는 것이 그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여기는 것 또한 그것입니다.

 

 

도무지 자신을 무너지고 부인되어야 할 존재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늘 예수로 인해서 원하는 것이 가득 채워지기만을 바랄 뿐이니 이것이야 말로 눈이 나쁨으로 인해서 온 몸이 어두운 실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눈으로 목격했느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일들이 우리에게 사실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지금 그때 그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을 쫓아낸 사건을 보셨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소경을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나도 저런 기적을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살아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동일하게 눈에 드러나는 표적에 마음을 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눈이 성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표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눈이 성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몸으로 체험되는 표적을 원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몸이 어둡다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기도 응답을 통해서 재물이 손에 쥐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위해서입니다. 병 고침도 몸을 위해서고 재물도 몸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처럼 자기 몸을 중심에 두고 표적을 구하고 재물을 구하는 것이 곧 세상이고 이러한 세상을 악하다고 보시기 때문에 표적을 구하는 것을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눈이 성하다면 예수님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인가를 보게 되면서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몸은 더러울 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의 몸으로 의를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 몸만을 귀하게 여기는 본성 때문에 늘 충돌만 야기할 뿐입니다. 의가 아니라 우리의 악함만을 드러내면서 더러운 자로 살아온 것이 우리입니다.

 

◉ 빛이 비취면 ◉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께서 비취시는 빛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그 빛이 우리에게서 이끌어 내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믿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괴변입니까? ‘기도하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욕망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병을 낫게 하신다’는 기적입니까?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취시는 빛은 우리에게서 회개를 이끌어 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보게 하시며 더러운 자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시고 나의 더러움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의를 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비취시는 빛을 받아들이며 그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회개하는 것이야 말로 눈이 성한 것이고 이것을 온 몸이 밝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온 몸이 밝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어두운 우리의 눈을 성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을 바르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빛으로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하며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이 심판 때에 이 세대를 정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빛을 비추셨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곧 어둠에 속한 세상이고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재물을 모으고, 기도가 응답되어 예배당을 지었다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고 말씀하지만 빛이 어두울 수는 없습니다. 참된 빛은 분명 밝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빛이 어둡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빛이 아니기에 온 몸을 비추지를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몸의 더러움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빛 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어둠의 길에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재물이 있다면 재물을 손에 쥐고 죄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이 같은 더러움을 보게 하는 것이 등불의 빛입니다. 눈이 성해서 이 빛을 받아들이게 된 신자는 회개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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