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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3 10:00

(98강) 권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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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1-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0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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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말씀과 신자 ◉

 

벧전 1:5절에 보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에 여러 가지 시험이 있고, 시험으로 인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모든 시험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시험에서도 구원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확실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시험과 시험으로 인한 근심을 통하여 스스로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고 이 믿음이 불로 연단도 없어질 금보다 더 나은 믿음으로 인정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벧전 1:6,7).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증거하는 것처럼 구원도, 마지막 때 믿음으로 인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도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베드로가 증거한 내용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증거 앞에서 무엇이 주장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열심입니다.

 

 

베드로는 분명 서신을 보내는 신자들에게 너희는 예비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험이 있고 근심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신자를 보호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구원을 향해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신자의 현실이라면 말한 대로 구원을 위한 인간의 그 어떤 열심과 행함도 부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는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고 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정하지만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법칙과 방법과 행함이 강조되고 인간의 권위가 높임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권위의 말씀 앞에서 세상의 모든 권위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참된 권위 앞에서 권위로 인정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말씀의 권위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사회에서 그리고 현대 교회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 무슨 권위로 ◉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함께 예수님께 와서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항상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에 반발하는 세력은 소위 종교 지도자에 속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고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반대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주목할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에서 도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기 위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그들은 도전과 위협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한 이들은 앞서 말한 대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 지도의 위치에 있으며 율법과 유대 신앙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시골 의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출생했고 전문적인 율법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나이도 젊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며 백성을 가르칩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생각한다면 무슨 권위로 그 같은 일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들로서는 당연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의 질문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할 일입니다. 만약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다면 너도 나도 말씀을 가르치겠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질서는 사라지고 혼란만 자초하게 됩니다.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옳습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동일합니다. 학교에서는 자격증이 있는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전문 분야에서 일할 때에도 자격증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도 목사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부여된 일입니다.

 

 

물론 목사가 아닌 일반 신자도 가르치고 설교 할 수 있지만 대개 목사가 부재중인 상황이거나 목사의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아무나 가르치고 설교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권위, 즉 자격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두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복음 전하는 권위가 있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때문에 우리 시각에는 권위에 대한 그들의 질문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쉽게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로서는 타당한 질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 권위를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런 이유인지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고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묻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준 권위가 하늘이 준 권위인지 사람이 준 권위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이들은 서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을 소신껏 답하는 것이 아니라 유불리를 따져 유리한 답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답도 이들을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는 추궁을 받을 수 있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이 분노하여 자신들을 돌로 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리한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결국 ‘모르겠다’고 답하고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 법과 전통에 의한 권위 ◉

 

예수님은 하늘의 권위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질문에 ‘하늘로부터 온 권위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번거롭게 요한의 권위에 대해 물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늘의 권위에 순종할 자들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하늘의 권위로 말하지 못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하늘의 권위로 인정한다면 요한을 믿었어야 했고, 그것은 곧 제사장, 서기관, 장로라는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적인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요한의 세례가 하늘의 권위라는 것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말한 대로 제사장, 서기관, 장로라는 직책과 그 권위는 율법에 따른 유대 사회의 전통입니다. 특히 제사장은 장차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직책이나 그 권위들은 참된 권위자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늘의 권위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권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지도자로 대접 받는 자기 권위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며 장로도 아닌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묵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고 있는 일을 묵인하면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가 종종 시빗거리가 되곤 합니다. 목사라는 권위를 내세워 교회의 모든 일과 재정 문제까지 간섭함으로 인해 문제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참된 권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천지 만물의 주재이시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그 어떤 권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권위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권위가 목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목사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유리한 말로 꾸며낸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목사가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게 되는 것은 하늘의 권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직접 교회에 존재하신다면 어떤 목사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 권위를 내세우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단지 명목상으로만 ‘예수가 교회의 머리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하늘의 권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권위에 복종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권세자이시고 그 권세, 권위에 복종하신다면 여러분은 주어진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권위에 의해 베풀어졌음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권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나름대로 권위가 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이 우리 속에 숨어서 항상 하나님의 권위에 반발하게 합니다.

 

 

마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반발하는 것처럼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권위로 되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내게 유리한 쪽으로만 흘러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불리한 일을 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 하나님의 권위 ◉

 

신자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사는 것이지 권위를 가진 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말씀을 전합니다. 때문에 자기 권위가 없고, 자기 권위가 없기에 지켜야 할 권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를 지키기 위해 유리한 말을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말씀만 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모인다면 서로 눈치보고 비교하고 경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을 내세울 모든 빌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풍족한 것도 빈곤한 것도 하나님의 권위임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타인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을 향해 교회가 하늘의 참된 권위 아래 있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권위에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권위에 반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위를 힘으로 여기고 그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늘 말씀과 성령의 권위에 복종되어져야 합니다. 신자가 말씀과 성령에 복종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책과 타인보다 더 많이 교회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말씀과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자기 권위라는 것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자기 권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 속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 내고 생명에 있게 할 수 있음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권위 앞에 세상의 권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말씀과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심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보게 하시고 항상 세상을 향하는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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