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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2 10:17

(99강) 포도원 농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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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9-1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009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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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 권위를 원하는 세상 ◉

 

본문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권위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쫓고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물은 것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예수님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추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자신들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설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들이 예수님께 권위에 대한 추궁을 한 것은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해 모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비록 제사장, 서기관, 장로의 위치에 있다 해도 그것이 권위가 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이 아닌 누구 앞에서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사장, 서기관, 장로의 직책을 대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 직책을 가진 자신들 역시 대단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권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제사장이든 서기관이든 장로든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거룩한 존재로 대접 받는 제사장이라고 해서 그 안에 탐심이 없다거나 미움이 없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비천한 사람이나 죄인으로 취급받는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과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직책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말에 있을 뿐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인간의 권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권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에만 마음을 두고 자신의 권위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신자며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어느 예배당이든 전면에는 대개 그 해의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표어만을 보면 모든 교회가 성경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진리의 길을 가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표어는 선전용일 뿐 대부분의 교회가 관심 두고 있는 것은 진리, 영생, 복음,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교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 앞에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에 복종하고 말씀으로 오신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세상은 자기 가치를 챙기기 위해 권위자를 오히려 배척해 버립니다. 이것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세상의 현실이며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모습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비유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포도원 주인과 농부 ◉

 

 

비유의 내용을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자신은 타국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오래 있다가 포도를 수확하는 때에 맞춰 농부들에게서 약속한 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종을 몹시 때린 후에 거저 보냅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내자 역시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고 세 번째 보낸 종 역시 상하게 하고 내 쫓는 악을 행합니다.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종에게 행한 것과는 달리 존대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었지만, 농부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유산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로 하고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입니다. 농부는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종이 농부들에게 매 맞고 쫓겨 난 것은 선지자가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 받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 쫓아 죽인 일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밖의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죽일 것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들이 주인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을 상속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들을 죽인다고 해서 주인의 것이 자신들의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그 유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국으로 가서 오래 있는 주인을 아예 죽은 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인을 죽은 자로 취급하기에 상속자인 아들만 죽여 없애면 주인의 것이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농부에 해당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죽은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죽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나라이며 영원히 유대인과 함께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와 가치를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권위 문제로 예수님을 추궁하는 이들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의롭다는 것을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기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 아무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위와 가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우리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인가 ◉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율법은 그들의 악함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권위와 의를 세우는 도구로 활용했고 결국 율법으로 아들을 배척하고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실상이 오늘 우리들의 실상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여기며 믿고 공경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인으로 믿는 믿음의 세계 안에서는 적어도 인간의 권위와 인간의 가치와 공로 등은 고개를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참된 권위자이시기 때문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적어도 이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안을 보면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의 농부들처럼 죽은 존재로 치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돌을 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지만 작금의 교회 현실은 ‘하나님은 죽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만 드러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나타내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인간의 권위와 공로와 가치, 그리고 힘을 위해 달려가는 종교인의 모습만 보이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만 죽이면 유산이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농부들처럼 자기 공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복음과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왜 죽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행 7:54절에 보면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면 회개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의해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면서 공회원이라는 권위가 손상됨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임으로써 공회원이라는 자기 권위와 가치를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공로와 권위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예수조차도 죽여 버리는 지금의 기독교인의 행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은 예수를 지극히 믿고 섬기는 자로 가득합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으로 넘칩니다. 하지만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권위와 공로에 붙들리고 자기 가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는 예수를 죽인 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는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하고 보답해주는 다른 예수를 예수의 자리에 대체해 놓고 있을 뿐입니다.

 

◉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

 

15절에 보면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 쫓아 죽인 농부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하시고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반응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17절)라고 하시고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18절)고 말씀합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자신들이 계속 포도원을 차지하고 있겠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였으면서 포도원만큼은 내놓지 않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참된 복음을 무시하고 예수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고자 하고 자신의 공로와 가치를 내려놓기를 싫어하는 기독교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버렸으면서도 버리지 않고 마치 예수를 잘 섬기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진심으로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권위 앞에 자신의 권위와 공로는 아무 가치가 없음을 믿으며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인 자고 복음을 들고 타인을 정죄하며 심판하는 자일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보게 하신 우리의 모습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며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릿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게 하시고, 이 돌을 사람 위에 떨어뜨려 가루로 만들어 흩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머릿돌 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깨어지게 하시고 가루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와 공로나 가치 따위는 깨어지고 사라진 채 아무것도 내어 놓을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내면을 보십시오. 우리의 속마음은 또 어떻습니까? 온통 자신의 권위와 가치를 위해 삽니다. 예수라는 이름 위에서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고 곤고히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예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라는 머릿돌 위에 떨어지게 되면 깨어지게 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 위에 덮치면 그는 가루가 되어 흩어질 뿐입니다. 결국 자신의 권위나 공로는 깨어지고 흩어질 뿐이며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만 그 심중에 남아있는 신자만이 진심으로 예수를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자로 증거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죄를 자각하고 그 죄로 애통해 하며 골수가 쪼개지는 고통의 자리로 끌려갔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안다는 것이 공로가 되고 권위가 되고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음에도 자랑과 공로로 삼고 다른 누군가의 위에 있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이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흘린 피가 바로 나로 인한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의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로 나의 의와 공로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인 자일뿐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라는 말에 발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옳은 말을 한다면 옳은 말을 한다는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것이 또한 여러분께 설교하고 있는 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를 그런 존재로 인정함으로써 바른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노림수가 제 안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뜨리시고 가루로 만드시고 흩으십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나의 것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우리 마음에 남기고자 하십니다. 내 안에 내 의가 있음을 보게 하시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살았음을 알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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