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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 09:48

(102강) 새로운 신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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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41-47http://onlycross.net/videos/nuk/nuk-20414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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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 신앙의 낡음과 새로움 ◉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돌아보고 고민해야 할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늘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신앙이 개혁적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제보다 좀 더 향상된 수준의 신앙적 삶이 있어야 한다거나, 또는 선한 실전적인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것은 낡은 것을 벗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낡은 것은 무엇일까요? 눅 5:36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낡은 옷은 율법을 의미하고 새 옷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새 옷이 있으면 낡은 옷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지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새 옷을 찢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낡은 옷을 수선하였다고 해도 새 옷의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방식으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율법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신앙의 중심에 자신을 세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율법적 행함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적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남들처럼 부지런한 행함이 없으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부지런히 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날까요? ‘믿음이 기도하게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기도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지런히’를 추가하여 생각합니다. 또한 믿음이 기도하게 할 때 그 기도에 어떤 내용이 담기게 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기도하게 한다면 그 기도에는 자신이 담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담기게 됩니다. 신앙을 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나는 버려지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도구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담긴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시간이나 횟수, 즉 부지런함과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복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면서 알게 되는 것은 복음의 세계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구원도 없음을 알게 되면서 점차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새로움입니다. 늘 자신이 부인되며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길로 가는 것이 신앙의 새로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늘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 없이 주를 찾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신앙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수 있고, 자신을 위해 신앙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신자로서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적 신앙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서기관의 허세 ◉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된 현실을 원합니다. 그 현실을 지키거나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 또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현실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 반발과 함께 공격을 하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발과 배척이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은 자신들이 유대 사회의 중심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의 종교와 정치 경제 모든 문제가 자신들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권위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에 계략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문제로 질문한 것도, 부활의 문제로 질문한 것도 모두가 자신이 중심이 된 현실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질문이었을 뿐입니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46절) 하십니다.

 

 

서기관은 대중들 앞에서 자기 존재가 부각되며 그에 따른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서기관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내가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대접 받는 중심의 위치에 있고 싶어 합니다. 서기관처럼 자기 존재와 신분을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상석에 앉는 것을 즐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의 사고로부터 끊임없이 분출되는 죄의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교리나 사상적으로 보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사두개인은 이단입니다. 하지만 교리라는 옷을 벗어 버리면 모두가 자기중심의 현실을 추구하는 동일한 존재로 드러날 뿐입니다. 결국 누가 누구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이 또한 현대 기독교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위 정통 기독교로 자부하는 교회들이 교리라는 잣대로 이단을 규정한다고 하지만 교리의 옷을 벗으면 현대 교회나 이단이 추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단이 인간을 교주화 하고 성경을 왜곡한다고 하지만 많은 교회 역시 목사가 교주처럼 신봉되고 있고 성경 또한 왜곡되어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비록 자신을 낮아지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도구로 사용 되는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때문에 신앙의 세계는 절대로 내가 중심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습관에 머물 뿐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때문에 신앙 또한 나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기중심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앙의 겉모습이 다른 누군가보다 월등이 뛰어난다 해도 나는 항상 부인되어야 할 존재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다윗의 자손 ◉

 

41절에 보면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다윗은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라면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다윗 자손이기 때문에 다윗 자손인 자신들을 위해 오신다고 믿은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메시아와 같기 때문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유대를 위한 메시아이고 유대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 역시 유대의 하나님이시고 유대를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42-44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는 하지만 혈통적 의미의 자손이 아닙니다. 이 근거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칭하는 시 110:1절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시 110편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다윗이 주로 칭하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인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사회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다윗 또한 그리스도 앞에서는 권위가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영웅으로 대접하는 다윗조차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권위가 없는 존재일 뿐인데 하물며 너희들에게 권위라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를 묻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의 메시아니즘은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었고,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들은 세계의 중심에 있게 된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아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는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부활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며 이것이 메시아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중심은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이실 뿐이지 인간의 권위 따위는 인정되지도 용납되지도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윗 자손에 대한 말씀이나 서기관에 대한 말씀은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그것은 다윗의 언약을 따라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다윗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즉 다윗은 메시아의 조상이 아니며 다윗이란 한 인간의 존재 의미는 다만 장차 오실 메시아를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앞에서 다윗의 권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 자기 부인의 세계 ◉

 

그러면 교회의 머리는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인간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내가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사가 교회의 중심에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내가 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개척했고 내가 열심히 목회해서 이만큼 성장시켰다고 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여긴다면 그 교회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자는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데 그리스도 앞에서 누가 자기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며, 누가 자신을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불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일 뿐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케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 이유도 ‘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낮아지게도 하시고 넘어지게도 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기부인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신앙인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자기부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면 자기 권위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 권위를 세우고 지키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들처럼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자기 권위를 흔드는 것이라면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를 알게 되면 자기 존재가 밀려가고 대신 그리스도의 은혜만 남게 되며 그의 삶은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자는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서로 은혜 안에서 함께 한다면 은혜를 아는 분은 자신이 알게 된 은혜를 말할 것이고, 자기부인을 아는 분은 자기가 부인되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고통과 갈등을 말할 수도 있고, 고통과 갈등으로 인해 배우게 되는 은혜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관계에서는 은혜를 안다는 것도 자기 부인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러한 점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내 중심으로 흘러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자다’라는 생각조차 무너져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 아닌 나를 신자로 부르시고 신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나는 신자다’라는 생각이 무너졌는데 자신의 신자다움, 자기 신앙을 더 돋보이기 위해 행동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나 같은 자를 신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일을 자기 본분으로 여기며 마음 둘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념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를 다스리며 말씀이 원하는 자리까지 끌어가십니다. 그리고 말씀이 있는 자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뜻에 붙들려 도달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너는 왜 이것 밖에 못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에게서 나타난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로 이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항상 지향해야 하는 새로운 신앙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날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게 하시고 내가 무너진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세우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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