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2.29 10:08

(90강)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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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5-17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151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아이를 물리친 제자 ◉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눅 4:43).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장 정확한 내용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이 전파되기 전 인간이 기대하고 상상한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늘 어려운 문제로 다가옴을 실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실상보다는 허상에 더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누구 하나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을 포함은 유대인은 물론이고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자신의 어린 아기를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아기를 만져 주시기를 바란 것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소문이 퍼졌고 랍비로 여김 받았습니다. 그러한 분이 자기 아기를 만져 주며 축복을 해준다면 아이가 무탈하게 잘 자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바쁘신 예수님에게 어린 아이를 만져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어린 아이를 만져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계에는 어린아이들은 끼어 들 수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사고방식이었음을 드러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어린 아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제자들도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책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현대 사회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부모들에게 아이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부모가 아이를 동일한 인격의 존재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아이보다는 부모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볼 뿐이지 부모를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로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아이보다는 부모가 더 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 어린아이와 같이 ◉

 

사실 사회적 지식이나 경제적 활동에서 아이는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을 예수님의 세계에 끼어 들 수 없는 수준 낮은 존재로만 바라봤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무척 당혹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을 뿐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히려 그런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17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어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되기에 너무 비약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른에 비해서 아이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다는 것이 죄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비록 아이라고 해도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사회적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문명 속에 살아가는 현대 아이들은 순수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어린아이와 같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의 성품이나 어른처럼 사회에 깊이 물들지 않은 것을 말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을 포함한 어른 누구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였다는 뜻일까요?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점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어른의 손에 이끌려 나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세계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른의 손에 이끌려 나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자신을 누군가가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종교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 ◉

 

이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리새인과 세리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말하는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리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끄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저하게 예수 의존적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지 않고 하늘로 주어지는 은총을 기꺼이 받아 누리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같은 종교의 세계에서는 이 같은 하나님 나라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지 않는 것을 인간의 무기력으로 치부할 것이 뻔하고 그것은 믿음의 역사도 성령의 능력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른의 세계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른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무능력을 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믿음으로 내세웁니다. 이런 생각에서 ‘내가 하면 너보다는 잘 할 수 있다’고 구별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와 가치의 세계입니다. 때문에 그 생각이 세상 질서와 가치에 매몰된 사람에게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밋밋하고 매력이 없는 것으로 다가옴은 당연한 것이고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막 4:11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 질서와 가치관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끄시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모두가 무능한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더 높은가’ 다투고 비교하며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세리와 같지 않다는 의식은 하나님 나라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만 보려고 하는 답답한 존재입니다. 말씀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손해와 이익의 계산 밖에 모르면서 오로지 내 이익만을 좇는 지극히 타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아무 매력도 없고 우리의 욕망이 추구하는 것과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알고자 하고 갈망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집중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육에 속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에 조금씩 마음을 두게 하시고, 그 나라를 보게 하시며 갈망하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한 감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육의 일로 인한 감사는 육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주의 일하심을 알게 되고 감사하는 것은 성령의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일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을 뿐 우리의 뜻과는 무관합니다. 가령 일본의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 정부가 항의를 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때 지진이라도 발생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의 일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지진으로 인해서 일본이 통째로 물에 잠긴다고 해도 그 때문에 육으로 사는 인간이 비밀인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고 갈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일은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 주께서 일 하신다 ◉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안주하면서 하나님 나라에는 도무지 마음을 두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비밀의 그 나라로 이끌어 가시고 그 나라를 알게 하시고 갈망하는 자가 되도록 일하시는 주의 일이 무능력한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하심을 믿으면서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이끄시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이 또한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내세우는 불만은 언제나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믿음과 연결시켜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행함이 있는 믿음에 비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들리셨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어린아이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이끄심을 믿고 의지하며 나를 이끄시는 예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 ‘그럼 그것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까?’라는 토를 단다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사회에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든 바리새인처럼 ‘나는 이것 이것을 합니다’라고 자기 의로 삼아서는 안 되며 세리처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신앙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는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과 현재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에서 나타난다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떤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며, 제자들을 세워서 어떤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성령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누가 높은가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의 삶에서 현재화 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같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실재를 사도 바울에게서 더욱 생생히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의 세계로 우리에게 임하여 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를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되게 하셔서 섬김과 겸손과 용서와 희생이라는 예수님의 길로 이끄시고 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주의 길로 인도 받는 신자에게서 나올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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