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1.05 09:55

(91강) 부자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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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8-3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18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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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설교>

 

◉ 하나님만 선하시다 ◉

 

지난주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7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타인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오는 아이의 모습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결론은 예수님이 나를 이끌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며 앞의 내용과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 그 실제적인 예를 부자 관리를 등장시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질문만을 생각한다면 영생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질문을 보면 영생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일컫는 것은 아마 이 관원의 눈에는 예수님이 유대 계명에 비추어 선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분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선에 대한 그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음을 먼저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선하다고 일컬은 것은 선에 대한 그의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그의 선의 기준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한분만이 선하다고 하심으로 세상에는 선하다고 일컬음 받을 사람이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도, 윤리와 도덕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어 있기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복 받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것이 선한 행위가 있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가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행위만으로도 영생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의 문제를 인간의 선한 행위와 연결하는 것이 이 사람의 문제이며 동시에 현대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바리새인들만 해도 선한 삶을 산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실천하는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되는 사람만이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소유의 문제 ◉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절)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계명들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계명들을 지켰는지 묻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계명들을 모두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음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 관리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답합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였을 것입니다. 계명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면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모태 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를 잘 다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도 힘을 썼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신앙 좋다고 칭찬받을 만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가진 소유를 모두 나눠주라는 말씀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소유를 포기한 채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갔던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톨릭의 테레사 수녀도 한 예라고 할 수 있고, 불교에는 성철 승려나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승려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청빈과 무소유로 유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소유를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완벽한 선을 행한 것이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이 관원은 부자였기 때문에 단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한 것이 문제임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일까요?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곧 온전한 선이고 영생을 얻는 실천이라면 그러한 실천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많지는 않지만 소유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모두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소유가 있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소유가 제자의 길이라거나 영생과 구원의 근거라는 뜻도 아닙니다. 고전 1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나눠주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몸까지도 내어 놓는 희생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으로 말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소유를 나눠주는 구제나 자기 몸을 희생하며 타인을 돕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생의 길은 아닙니다. 영생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끄심으로 가능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지 우리의 선함과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 선한 실천을 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부자 관리는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의 문제로 답하십니다. 그것은 소유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소유가 곧 생존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소유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상승되고 하락되기도 합니다.

 

 

소유가 없는 사람은 온갖 설움을 겪기도 합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무시를 받을 때도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로 살아가는 환상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소유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에서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말씀하기 위해 소유를 모두 나눠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무엇을 하여야 ◉

 

영생에 대한 관리의 질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인간의 본질의 문제에 생각을 두었다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기보다는 ‘나 같은 자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무엇을 하여야’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제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께 나올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더러움이고 저주입니다. 때문에 영원한 사망만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지 복, 영생, 구원, 면류관과는 아예 무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앞세워 그 모든 것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복과 영생과 구원과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관리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복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을 세리와 다르다고 생각한 것 역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실행한다고 해도 그 본질은 죄고 저주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든 세리든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성경의 의미에서 벗어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부자 관리처럼 인간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천국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대신 복을 받기 위한 종교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예수를 믿은 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에게 면허증이 발급되어서 스스로 차를 운전하여 목적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린 다만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이끄심으로 영생을 얻는 존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운전하시는 차에 타고 있을 뿐인데 차가 도착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운전하심으로 예수님이 뜻하시는 곳에 내가 도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그 믿음으로 선한 실천을 해서 하늘의 상을 받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관리이면서 부자였습니다.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것입니다. 거기에 영생까지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육신과 영의 모든 문제에서 확고하게 하고자 한 것이지 영생의 문제에 더 큰 가치를 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유를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에 근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죄인이며 참으로 불쌍한 존재임을 보게 합니다. 하지만 계명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실천해야 할 항목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리고 실천이 쌓일수록 영생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관리에게 먼저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었음을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소유를 나눠주지 못하고 근심한 것은 소유가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 가치도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절)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 하나님만이 하신다 ◉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붙들려고 하고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만 있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알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부자는 단지 돈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인간은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얻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의 실천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베드로가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문제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하는데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신들을 내 세웁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을 자신들의 실천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을 다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의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버림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애당초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나와 연결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를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버림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무엇으로도 가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지 않으며 자신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사망에 속한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로 여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높임 받는 것으로만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나의 본분임을 알고 그 길로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도 신자가 나아갈 이 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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