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1.12 10:17

(92강) 감취어진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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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31-3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313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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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설교>

 

◉ 보이지 않는 실재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보이는 현재의 세계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에게 이 같은 믿음은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신자가 믿음에서 기대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고 드러나는 믿음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기대가 다 무너지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붙들고 있는 헛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세상의 심판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역시 실현되지 않을 꿈같은 일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실현되지 않을 일을 실현된다고 믿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볼 때 부활과 재림과 심판, 천국, 지옥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헛된 망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비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드러나고 목격되거나,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나 흔적이 있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실재와 미래에 대해 약속된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헌신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반드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얹어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실상이 보이지 않다는 것이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당초부터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항상 보이는 현실에서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좀 더 가치 있게 향상하는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와 소망을 둔다는 것은 분명 우리의 힘을 벗어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부자가 당면한 문제였고, 우리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부자 관원과의 대화를 들었던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일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였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힘쓰는 것이 인간 스스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본문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절)고 하시면서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는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감추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 모든 내용들이 깨달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말씀에 담겨 있는 영생의 길로 방향을 바꿀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절)는 베드로의 말은 주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한 자의 허세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자기의 것을 다 버렸다고 하지만 버리지 못한 것, 아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부자 관원 역시 동일한 문제였습니다.

 

 

부자 관원이나 베드로는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재물을 버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부자인 관원은 근심을 했고,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는 자신 있게 모든 것을 버렸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버림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에게서 드러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빌 2:6-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의 버리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영광과 존귀를 모두 버리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자리로 낮아지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하, 즉 버리심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씀하기 위해 ‘있는 것을 다 나눠주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자기 버림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루심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자기 버림의 길 ◉

 

부자 관원은 영생의 문제를 자신이 무엇인가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대로 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생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영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심으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버림으로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 관원이나 베드로가 생각하는 구원에 하나님의 자기 버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감취어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세 번(9:22,44 17:25)에 걸쳐서 말씀하셨고, 수난의 의미가 담긴 말씀(12:50 ; 13:32-33)까지 포함하면 본문은 여섯 번째의 수난에 대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매번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수난을 제자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수난, 즉 십자가의 길은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진리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지 않으시면 우리의 죄가 용서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성경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십자가가 우리에게 자기 버림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의 본질이 자기 버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수난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수님께는 그 길이 수난과 함께 자신을 버리는 길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따랐을 뿐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믿음의 문제를 현세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자기 버림의 길로 바라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십자가는 감추어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는 안다고 하지만 알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본다고 하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자 관원은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입니다. 영생을 얻고 싶어 한다고 해서 재물을 얻고자 하는 것보다 믿음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관원이 큰 부자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재물을 얻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는 재물의 만족과 함께 영적인 만족까지 누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이 십자가를 발판 삼아 예수님을 찾는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버림을 알지 못한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주일오후 기뻐하시는 자 시 147:1-11(12.29일 설교 151강)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수난을 말씀하신 뒤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부인, 즉 버림의 길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름으로 얻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이 가르침은 그들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고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반응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버림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 외에는 누구도 십자가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취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울 것은 버림입니다. 예수님은 버리기 위해 오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얻어 보겠다고 옵니다. 애초부터 예수님과 어긋나 있습니다. 영생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원처럼 계명을 잘 지키고 선을 행하며 살았으니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

 

우리를 이러한 착각에서 건져내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단단한 착각의 세계를 깨뜨리시고 십자가의 새롭고 빛나는 영광의 세계를 보게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총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 은총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버림의 자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감취어진 말씀을 알게 되면 자기에게 구축되어 있던 모든 틀이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종교적 사고가 왕창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없이는 말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를 보면 마치 부자 관원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모임처럼 느껴집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처럼 ‘무엇을 하여야 복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고, 교회는 선한 삶과 함께 교회에서의 봉사와 헌신, 그리고 소유의 전부가 아닌 십일조를 바치게 함으로 복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문제는 단지 교리와 상식적인 문제로 여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내용만 알고 있고 받아들이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라고 하면서 목사가 말하는 내용들을 실천해 가는 것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깨달았고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께 이 말씀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묻겠습니다.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보았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이에 대한 것입니다.

 

 

보물찾기 놀이를 할 때 보물 쪽지를 미리 감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쪽지를 감추면서 아예 찾을 수 없도록 깊숙이 감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원망만 들을 것입니다.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적당히 감춥니다. 조금 좋은 상품이 적힌 쪽지는 조금 더 찾기 어려운 곳에 감추지만 아예 못 찾게 하려는 목적으로 감추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예 찾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말씀을 감춰 버립니다. 도무지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없는, 봐도 진리가 아니라며 팽개쳐 버릴 그런 말씀에 영생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만 그 손을 끌고 말씀 앞으로 데려가셔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버림이 곧 십자가의 길인 것을 알지 못하고 얻기 위해서 주를 찾고 불렀던 것이 모두 십자가 밖의 자신의 종교 세계였을 뿐임을 발견하고 한탄하게 되며 버림의 길로 가기 위해 주의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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