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1.19 10:05

(93강) 보게 된 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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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35-43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354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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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설교>

 

◉ 채움과 비움 ◉

 

베드로가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절)보란 듯이 말했지만 그 말에서 드러난 것은 베드로 역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집과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할지라고 기실 자기 자신은 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 부자 관원이 실천하지 못한 것을 자신들은 이미 실천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부자 관원과 제자들이 스스로 갈 수 없는 자기 버림의 길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버림이라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자신에게 집착하며 이기심과 탐욕이 지배하는 죽음의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라면 결코 자기 채움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수 없음을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를 영생을 얻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도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 버림의 길을 가신 주를 따르며 나 역시 자기 버림을 배우는 길로 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나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비움이 아니라 자기 채움을 위해 예수를 찾는 것이 선명히 보이고 교회 내에서 전파 되는 내용 또한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았던 마음과 동일하게 육과 영, 모든 영역에서 자기 채움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채움이 아니라 자기 비움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과 같은 길을 간다면 같은 길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를 앞서고자 하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아예 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경쟁할 것도 없는 길에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는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면 십자가에 담긴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을 당하시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지를 제자들은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말씀은 감취어진 것이었습니다. 감취어진 말씀은 예수님이 드러내시고 보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길 가에 앉아 구걸을 하던 한 맹인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맹인은 앞서 가던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시고 가까이 온 맹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맹인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맹인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일을 한 사건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놀라운 기적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께 나오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자기 채움이라는 욕망에 붙들린 해석만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자기 채움을 위해 예수를 찾는다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능력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범위이고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인간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를 비롯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모든 저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들을 단순히 놀라운 기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건과 사건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말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복음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에서 말씀을 듣지 못하고 능력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병 고침과 귀신 쫓음과 같은 외적인 현상만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 맹인의 믿음 ◉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은 감취어져 있었고 따라서 자기 버림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세계를 볼 수도 알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믿음에 대해서는 깜깜한 맹인과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맹인과 같은 형편이면서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세대의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맹인은 예수님에게 보기를 원한다고 했지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네 믿음이 너의 눈을 뜨게 했다’고 하시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은데 왜 맹인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중점은 맹인이 구원을 받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맹인의 믿음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맹인을 도구 삼아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그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생의 여부를 자기 행함의 문제로 바라보는 부자 관원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원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영생, 즉 구원의 여부를 자기 행함과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을 들은 맹인의 믿음은 자기 행함과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았다는 선언을 들었다는 것은 구원의 믿음은 행함의 문제와는 상관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맹인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으로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신뢰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잠하라고 꾸짖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른 간절함을 맹인의 믿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맹인의 믿음은 부자 관원, 제자들과 대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 관원과 제자들의 믿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부족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관원과 제자들이 본 것은 자기 행함이었습니다. 자기 행함을 구원의 확실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자기 행함을 바라보는 것은 큰 장애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믿음의 길을 바르게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맹인의 처지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맹인은 누가 봐도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맹인에게 눈을 뜨는 것은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맹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맹인의 외침은 자기 관심 밖의 문제로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앞서 가던 사람들은 맹인을 향해 잠잠 하라며 꾸짖었습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제자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맹인의 외침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누구건 맹인을 꾸짖었다는 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맹인의 외침을 귀찮아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보지 못한 맹인에게는 봐야 한다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지만 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고 따라서 그들을 절박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고 갈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생존이라는 문제에 절박합니다. 직장 문제, 아이들 공부 문제, 가정 문제, 그리고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관심 밖의 일로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생명에 대한 외침을 향해 내심 ‘잠잠하라’고 꾸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외침에서 믿음의 본질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맹인을 꾸짖을 뿐입니다. 믿음이 믿음을 알지 못한 자들에 의해 배척 받는 것입니다.

 

◉ 믿음의 눈이 있다면 ◉

 

그렇다면 맹인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보지 못한 자기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지 못함은 단지 사물을 볼 수 없는 육신적 맹인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볼 수 없는 영적 맹인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자임을 보지 못하는 것도 영적인 맹인이고, 자신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는 것 역시 영적인 맹인입니다.

 

 

그렇게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불쌍함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맹인을 구원하였다면 관원이나 제자들은 전혀 다른 믿음의 세계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맹인의 믿음과 관원이나 제자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보게 된 맹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자신이 보게 된 기적의 사건을 자신과 전혀 결부시키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결과로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는데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다’며 자신의 노력을 앞세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맹인의 그러한 노력도 칭찬할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을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의 시각일 뿐입니다. 맹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외칠 수 있게 하신 분이 있음을 도외시 한 것입니다.

 

 

맹인은 보게 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하신 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가 나를 보게 했다’는 이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고 이 은혜를 알게 됨을 인해서 자기 채움이 죄악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채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들이야 말로 인간의 종교 세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불쌍함을 알지 못합니다. 본문의 맹인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은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다면 길가에 있는 풀 한포기, 들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서까지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저주신 은혜가 우리의 채움이 되면서 더 이상 채워짐에 목말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은혜의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세계입니다.

 

 

보게 된다는 것이 우리를 이러한 은혜로 세계로 이끄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보게 되는 것에 절박함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또한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맹인의 외침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선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놀랍고 신기한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발생하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기적의 사람 중의 하나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바울 될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만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은혜를 알게 하신 사건으로 감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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