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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6 10:18

(94강) 삭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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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1-1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901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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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설교>

 

◉ 새로운 질서의 세계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초월적 세계입니다. 이 세상의 원칙과 상식과 질서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의 원칙과 질서 안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신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는 눈이 있는 자만이 볼 수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듣고 깨닫고 접할 수가 있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여전히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려고 하는 어리석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아직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들리기 십상이고 실감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비함을 알도록 부름 받은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질서를 배우며 그 질서에 순응하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진 구원의 세계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전한 말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시는 것이었기에 세상의 가치와 상식 안에서는 아무것도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배우며 모든 행적에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이유도 자신들에게 습득되어 있는 기존 세상의 질서와 가치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존 세상의 질서와 틀 안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해준 것들의 연장과 확대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앞서 말한 대로 새로운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삭개오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는 예수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을 생각해 보면 뭔가 새로운 말씀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고 익숙해져 있는 신앙의 틀 안에서 생각하게 되면 새로운 말씀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신앙의 연장과 확대의 의미로 해석하게 될 뿐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를 보기 위해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열심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열심을 보시고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으며, 그 말을 들은 삭개오는 즐거워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는 변화가 있음으로 인해 예수님께로부터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포를 받게 되었다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삭개오처럼 항상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심과 함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중점에 두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 새로움은 당연히 없습니다. 다만 기존의 신앙을 좀 더 확대시키자는 독려 차원의 가르침으로 끝날 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 하나는 성경은 기존의 해석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이 고여 있는 샘이 아니라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는 샘과 같기 때문에 기존의 해석에 붙들려서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좀 더 알고자 하는 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신앙 세계만 잘 유지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의 상투적인 종교의 모습에 빠져 있거나 단지 세상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채우고자 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익숙한 해석에만 머물려고 할 뿐이고 말씀이 인도하는 깊은 신앙의 세계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눅 9:51절의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면 9:51절부터 예루살렘 여정이 끝나는 19:44절까지의 모든 사건과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당연히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과 연결되어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발생한 사건과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누구도 아닌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할 사람도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말한 대로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성경 용어나 교리적인 차원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된 자에게서는 자신을 내려놓게 되는 현상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질서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기 가치를 확대하고자 하는 기존 세상과 달리 자신을 내려놓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생히 활동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 행함과 무관한 구원 ◉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셔서 만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여리고 지역의 세금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는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많은 세금이 발생했을 것이고 로마 입장에서 여리고의 세리장은 중요한 자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삭개오가 있었던 것을 보면 로마로부터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유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같은 민족을 괴롭히는 매국노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세리에 대해서 보다 더 큰 분노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부자라는 것도 세리장이라는 지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궁금하여 보고자 하였지만 키가 작고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앞으로 달려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앞에 오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삭개오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대할 때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에게서 구원의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타인과는 다른 바람직한 행함이 있었고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을 우리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제시하는 것이 기존의 성경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삭개오에게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만한 행함이 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남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으면 본래 물건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보내라고 되어 있습니다(레 6:5). 그런데 삭개오는 율법의 요구보다 어 이상의 것을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삭개오의 회개의 열매로 이해하면서 결국 회개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삭개오가 회개함으로 그 같은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구원의 근거로 자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삭개오의 변화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자 관원에게 소유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자 관원은 그 말씀에 근심하였지만 삭개오는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분명 부자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유 절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말을 회개의 열매로 강조하면서 삭개오와 같은 삶의 변화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으로는 본문을 제대로 해석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이 임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의 말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구원이 삭개오의 말에 대한 응답이라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삭개오처럼 소유 절반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과연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또한 소유 절반을 내어 놓는 것이 회개의 증거, 또는 열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회개와 상관없이 자기 소유를 내어 놓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구원을 말하면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자로 부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이미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삭개오의 말이 있기 전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구원은 삭개오의 행동과 무관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맹인의 믿음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 것처럼 본문 또한 삭개오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로 세상에 오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 십자가의 세계 ◉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는 삭개오 같은 사람은 구원과는 무관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 세계의 질서고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원칙은 잃어버린 자, 즉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본질은 거저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공로가 전혀 없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이 같은 구원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사람은 애당초 자신은 구원과 무관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가르치기 위해 내세울 적격자로는 유대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세리, 맹인,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수군거린 것은 기존의 질서와 틀에 갇힌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율법과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존의 질서와 틀을 부숴 버립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생각을 뒤엎고 초월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고 신비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세계에 부름 받은 신자가 배우게 되는 것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새로운 질서의 나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이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장인 삭개오가 부자였다는 것은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하게 돈을 모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유 절반을 내어 놓고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더 이상 재물을 추구하는 삶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회개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배척을 받는 삭개오에게 그를 지탱하는 힘은 재물이었을 것입니다. 재물만 가지고 있으면 비록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재물이 아닌 예수님이 힘이고 영광이며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높임 받게 되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재물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배우게 된 신자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행함과 의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삭개오에게 임했다는 뜻이 됩니다.

 

 

즉 삭개오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함이나 의와는 무관한 것이고 그것이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원 원칙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원 원칙과 질서 안에서 수군거림은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면 예수라는 이름과 신앙조차 나의 이름과 영광, 현재의 삶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와 공로에만 마음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실천에서 어떤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행하심에만 가치를 두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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