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8.08 18:20

(73강) 어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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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9-1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50914(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라는 한 유대인 남자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구원자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과 사상과 이념에 따라 보편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목숨이 위협받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를 용납하지 않거나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들 속에서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랬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아 죽은 한 남자를 주로 섬기고 그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부정적인 일이고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세상의 심판을 믿습니다. 사회적으로 혼란을 줄 수도 있는 교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유대교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붙잡아 처형한 사람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당시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힘든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고 말합니다. 전에는 어둠이라는 말이 시대 상황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어둠이 시대 상황을 의미한다면 ‘빛이라’는 말은 어둠의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는데 시대 상황이 나아진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 조건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을 ‘빛의 자녀’라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아마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빛의 자녀’라는 말이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를 빛의 자녀로 일컬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라는 말이 실감 있게 다가오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빛의 자녀는 뭔가 빛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빛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세상과 다르지 않게 현실을 추구하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빛의 자녀는 크게 실감 있는 말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빛의 자녀는 세상이 생각하는 빛다운 모습을 보임으로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빛은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 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참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모범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사람들의 빛은 생명이고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메시아인 것입니다. 따라서 빛은 인간의 행함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생명이 빛이라면 어둠은 무엇일까요? 자연히 생명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죄만 있기에 생명이 없으며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영원히 사망에 있어야 하는 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생명이 없어도 세상은 나름대로 잘 삽니다. 사건 사고도 많지만 나름대로 윤리와 도덕, 그리고 법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망에 갇혔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때문에 달리 생명이신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11절에서 말하는 어둠의 일은 무엇일까요? 어둠은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이신 빛을 좇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얻기 위해 힘씁니다. 빛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으로 거듭난 증거를 만들려고 하고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자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둠의 일에는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스스로는 열매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열매에 대한 곡해로 인한 것일 뿐, 빛으로 인한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보게 됩니다.

 

 

사 66:3절을 보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삶이었지만 실제로는 거룩과 상관없는 위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가증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행한 일을 발판 삼아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없는 어둠의 일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어둠의 일이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이고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나지는 것이 곧 빛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어둠의 일을 책망하는 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라는 것은 허물과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칠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인 자신도 동일한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죄 가운데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자신의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스스로 의를 행하여 거룩한 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으로 감사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둠의 일에 있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를 빛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어둠의 일을 책망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특별히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형편에서든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셔서 어둠을 책망하시겠다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인 신자는 어둠의 일에 참여할 자가 아닌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둠이었던 자들입니다. 어둠이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리고 어둠의 삶이 주 안에서 빛이 되었을 때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면 어둠의 일과 빛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되었을 때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어둠을 어둠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은 생명이니까 산자라고 할 수 있고 어둠은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인식의 전환이란 인간을 산자와 죽은 자로 보면서 예전에는 살아있는 상태로 여겨졌던 것들이 죽은 것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은 죽은 자가 죽음이라는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을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모두가 어둠의 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로 인해 누리게 될 자기 유익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 어둠의 일인 것입니다. 어둠이라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같은 사실이 빛이 옴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는 자신의 힘으로 뭔가 행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어둠으로 보게 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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