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1.18 18:08

(72강) 침노 당하는 천국

조회 수 6817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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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7-1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071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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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7-15 개정)

 

<설교>


 어리석은 생각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앙의 세계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신기합니다. 즉 신앙의 세계는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다스려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욕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며 작정기도라는 것을 합니다. 그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문제와 고통이 계속될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는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왜 신자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잘못된 기도가 원인일까요? 그러면 기도를 제대로 하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이 안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믿음을 제대로 갖춰서 기도하면 모든 기도에 원하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간증이라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고 문제 해결을 받은 얘기들을 많이 늘어놓지만, 다른 사람이 그들처럼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보다 믿음이 못해서인 것입니까?

 

 

사실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고,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왜 침묵으로 일관하시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일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하는 말일뿐, 정작 우리의 눈에는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천국이라고 외칠만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성경에서 외치고 있는 말로 끝날 뿐, 실제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고 실감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도 신자 스스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어려운 일을 도와주신다면 믿음이 더 굳건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의 이익 위에 세워지는 가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된 믿음은 오직 진리로 인해서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눈으로 확인되고 체험되고 실감되는 육체적인 사건들이 없다고 해도, 즉 우리가 기대하는 응답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신자가 진리를 가졌다면 그 진리로 인해서 믿음이 견고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자인 것입니다.

 

 

 

 

 선지자 요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문은 참으로 뜻밖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라 너무 잘 알았던,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던 요한입니다. 그런 그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요한의 혼란은 예수님이 요한이 기대하는 메시아답지 않은 일을 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문둥병자와 같은 병자를 고치신 일은 요한이 생각할 때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은 자를 향한 심판의 일도 아니었고, 천국과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옥에 갇힌 자신을 구출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혼란과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10절)고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가 바로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7,8절)

 

 

세례 요한은 광야가 활동무대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광야의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요한을 크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즉 오리라고 예언된 선지자로 본 것입니다(눅 20:6).

 

 

선지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지자인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치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굳건한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님을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광야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편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위치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옥에 갇혀서 고초를 겪고 있다고 해도 광야의 선지자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고 편하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지 광야에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이 고초를 겪고 설령 죽는다고 해도 요한은 선지자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요한을 큰 자로 일컫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을 큰 자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요한보다 큰 자

그것은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자가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요한이 아니라 요한보다 더 큰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요한보다 더 큰 자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13절에서 말한 대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증거한 사람입니다. 이 일을 할 사람으로 요한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사람이고, 그 예언을 따라 예수님보다 먼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한 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추켜 세워주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신자를 요한보다 큰 자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신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까?

 

 

세상은 큰 자, 작은 자를 행한 일을 가지고 구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큰 일을 행했기에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한 일을 가지고 큰 자로 일컫는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큰 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행한 일로는 그 누구도 요한보다 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한 일을 가지고 큰 자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안다면 신자는 행함을 가지고 크다 작다는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 행한 일이 많으니 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일꾼이고, 행한 일이 적으니 그보다 못한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천국 방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다면 도무지 그런 생각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함을 가지고 크다 작다 비교를 하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함의 크고 작은 여부를 따라 상을 다르게 주는 천국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행함을 바라보고 행함에 매어 살기 때문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신자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도 누리지를 못하고 항상 보이는 것 때문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1절 뒷부분에 보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요한보다 큰 자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 큰 자가 있고 작은 자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해도 요한보다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있는 모든 자가 요한보다 큰 자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어떤 사람이 천국에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일 것입니다.

 

 

침노는 쳐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신자가 쳐들어가서 빼앗아야 하는 곳이고, 또 하나님은 천국을 빼앗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까? 이런 천국은 분명히 없습니다. 우리가 빼앗을 수도 없지만, 빼앗는다고 해서 빼앗기는 천국도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을 침노하는 것을 착하게 살고 율법을 준행하며 구제와 하나님 일에 열심을 내어야 구원 받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침노하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에 힘써야 하고, 구제와 선행과 전도에도 열심을 내야하고, 선교에 적극 후원하거나 동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한 침노가 전혀 아닙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의문을 가진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여 불에 던지는 것이고 요한도 옥에서 구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옥에 갇힌 요한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에 따라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서의 일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요한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과 같은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수없이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될 때 예수님에 대해 의문이 있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 때문에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흑암에 갇힌 자들에게 빛이 되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고 믿는 사람입니다. 즉 죄에 갇힌 자를 구출하시는 것이 빛으로 오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일로 여긴다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이 안되고, 형편과 처지가 달라진바가 없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견고한 믿음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에 자신의 기대와 소원을 포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잘라내지 못할 때, 항상 기대와 어긋난 결과와 현실로 인해서 천국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을 누리고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헛된 기대와, 우리의 예상과 계획과 고집 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나에게 날마다 변함없이 그 일을 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옥에 갇혀있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살아서 예수님의 일을 하고 계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둔다면 우리가 가진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기대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내 처지를 위해서 예수님이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것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고,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얼마든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것을 천국을 침노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런 신자의 것입니다.



  • 김성한 2010.01.22 03:24
    목사님... 동영상 소리가 안나네요...? 제 컴퓨터가 이상한가요??
    다른 동영상 설교는 소리가 나는데....
  • 신윤식 2010.01.22 08:48
    볼륨을 좀 올려 보세요. 다른 동영상보다 음성이 작게 나오네요. 몇주 전부터 마이크 음성이 갑자기 작아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되는 현상이 있어서 믹서의 마이크 단자를 2번으로 옮겼는데 볼륨이 작게 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 박철현 2010.01.23 22:39
    제 컴퓨터에서는 소리가 잘 나오는데요... 근데 "침노하는 자는 빼았는다"는 표현은 이 표현 자체로 봤을 때 이해하기 힘든데 설교 시간에 한번 만 더 설명 부탁드려요.
  • 김성한 2010.01.24 20:29
    이제 잘들리네요... 전에는 안들렸는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신윤식 2010.01.26 22:29
    박집사님의 글을 보지 못해서 지난 주일에 침노에 대해 보충설명을 못했네요. 박집사님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신 것을 보니 다른 분들도 이해하지 못한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여기에 답변을 하는 것보다 이번 주일설교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일까지 기다려주세요. 집사님도 좀 더 묵상해 보시구요.
  • 송수경 2010.01.29 10:57
    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당하게 되었을까요?
    (막3:22~30) 의 말씀을 참고하여 침노하는 자를 예수님으로 봐도 될런지요...
  • 신윤식 2004.01.01 06:13
    세례 요한의 때 부터라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천국이 임한 것으로 처음 증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막 3:22-30절의 말씀은 사단에게 결박되어 있는 택한 백성을 예수님이 사단을 치심으로 구출하여 내신다는 의미의 말씀이기 때문에 천국을 침노하는 자에 대한 내용과는 연관이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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