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8.04 09:50

(71강) 겨자씨와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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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18-21http://onlycross.net/videos/nuk/nuk-1318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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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설교>

 

◉ 믿음과 행함 ◉

 

유대인들은 믿음을 율법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특히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대단한 열심을 보였던 바리새인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기도, 구제, 금식, 십일조 등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믿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바리새인을 비판하면서도 교인들을 바리새인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지 율법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적 실천을 의로 여기고 믿음의 기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실천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행함이기 때문에 의로우며 믿음의 모습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의 눈에는 율법을 어기며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회당장이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에 대해 분을 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헌금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헌금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아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나 힘을 필요로 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만 할 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세워졌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어떤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로 모여도 드러나는 것은 늘 죄에 오염된 인간으로서의 본성적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매이게 되면 믿음 또한 보이는 것으로 계산하고 판단하게 될 뿐입니다. 눈에 보인 일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고 결국 믿음에 열심히 없고 게으른 자로 판단합니다. 또한 행해지는 일들도 큰 일과 작은 일로 구분하고, 믿음도 큰 믿음 작은 믿음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은 믿음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큰 믿음을 갖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의 능력과 업적을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이루신 업적에 마음을 두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자신의 행함에 초점을 두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겼기에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시는 능력과 그 업적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비유를 말씀합니다.

 

◉ 하나님 나라 ◉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중에는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가 되고, 아주 작은 분량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이라는 큰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 것을 하나님 나라로 비유한 것입니다.

 

 

믿음을 큰 업적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비유를 대개 성장과 변화,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비록 지금 보기에는 볼품없고 작다고 해도 결국은 큰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고,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는 자라가야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왜 하필이면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하시는 것일까요? 가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겨자씨나 누룩은 아무것도 아닌 볼품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작은 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말씀하고자 한다면 겨자보다는 좀 더 쓸모 있고 가치 있는 다른 나무를 등장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나무는 작은 씨가 자라서 크게 될 것이니 겨자보다는 더 크게 자라는 나무를 등장시키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룩 역시 같습니다. 누룩은 12:1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유대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 규례를 세우시면서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서에서 누룩은 부패의 의미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가루에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드는 것은 여자의 일이기도 합니다.

 

 

즉 누룩은 여자에 의해서 가루에 넣어진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여자는 무시의 대상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자의 일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시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누룩은 위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는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이 그저 변화의 힘을 발휘하는 능력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겨자씨와 누룩은 그 존재가치성으로만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도구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에 가치 없는 것, 더러운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회당장과 같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죄인들입니다.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열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내야 했던 여인과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스스로를 의롭고 정결하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러운 존재들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구분하는 의식이 살아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 좋은 사람만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교회로 모이는 지체들을 바라볼 때도 누가 믿음이 좋고 누가 믿음이 나쁜가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믿음의 세계 ◉

 

회당장은 허리가 굽어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여인의 병을 고쳐준 예수님의 일을 겨자씨 한 알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것을 더 거룩하고 믿음 좋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여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그 고통에서 자유롭게 한 예수님의 일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담겨 있는 위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회당장의 실체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의 일을 안식일 규례를 어기는 죄로 여겼습니다. 어쩌면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감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상에 다른 유대인들이 물들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누룩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었다면 겨자씨 한 알은 작은 것입니까 큰 것입니까? 분명 우리 눈에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습니다.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말 그대로 겨자씨 한 알일 뿐입니다.

 

 

그 까짓것 내 손에서 없어진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겨자씨 한 알은 큰 나무라는 본질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겨자씨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겨자씨를 두고 작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는 믿음의 시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누룩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룩이 가루 서 말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누룩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와 부패의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됐건 가루 서 말에 비해 누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루 반죽에 누룩이 섞여 가루가 부풀게 되면 더 이상 누룩과 가루를 분리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인 믿음의 세계를 우리의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거룩하고 더럽고, 크고 작다는 것으로 구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회당장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여겼기에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일을 죄와 부정한 것으로 규정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신자라 이름하는 사람들이 신실한 믿음을 명목으로 함께 하는 지체를 향해 선을 긋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결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고 예수님의 일을 바라보고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며 마음 뿌듯해하고 스스로 가치 있는 행함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신자는 자신의 그 어떤 행함에도 늘 부끄러운 마음만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에 비해 자신의 행함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존귀한 사건 ◉

 

여러분 신자가 천국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 고생하며 멸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여인도, 회당장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지킴으로 신실한 사람이라며 뭇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회당장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이것이 구원의 참된 현실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품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신실한 신자이며 죄 없는 거룩한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신자가 스스로의 힘과 열심히 갖추어야 할 다른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가능하면 믿음의 실천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분에게는 힘 빠지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말은 실천적인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가치 있는 것으로 세워질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소위 여러분의 실천적인 삶을 신실한 믿음으로 여긴다면 결국 회당장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의 일을 바라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나 누룩의 결과에만 초점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 것처럼 우리도 작게 출발했지만 큰 나무가 되도록 힘쓰자’라고 한다면 이 말이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에 맞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더러 큰 나무가 되고 밀가루를 부풀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눈에 보인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본질도 아니기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 것을 말씀하는 것임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지금은 겨자씨처럼 볼품없고 누룩처럼 신실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어떤 큰 업적을 쥐고 있어야 신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4:4절에 보면“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한 성령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 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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