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8.18 09:56

(73강) 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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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31-35http://onlycross.net/videos/nuk/nuk-13313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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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예수님의 인생 ◉

 

예수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사시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33년의 짧은 인생도 따져보면 내노라 할 것이 없습니다. 30년이 될 때까지의 삶은 알 수가 없고 그리스도로서의 공적인 삶은 겨우 3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3년의 기간에 세상이 놀랄 만한 업적을 남겨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는 오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성공하는 인생을 원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성공을 ‘목적하는 바를 이루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그르침’이라고 풀이합니다. 즉 단지 높은 자리에 오르고 권력과 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목적하는 바를 이룬 것을 성공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성공을 말할 때 우리가 인생에서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두고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실패라고 해야 할까요. 외형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일생은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33년의 일생 동안 이루신 것이 전혀 없고 초라하고 힘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 받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인생을 본받고 싶어 하고 자신도 같은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인생을 본받기를 원하고 예수님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의 속마음이 예수님의 인생처럼 되는 것을 꺼려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인생을 성공이 아니라 실패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써 예수님의 인생을 실패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로 오셨고 세상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죽음이라고 말할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가신 길과는 다른 길을 가는 인생을 원한다면 예수님의 인생을 두고 성공이라고 말하는 우리 자신이 실제로는 어떤 인생을 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 여기를 떠나소서 ◉

 

본문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율법의 문제로 그들과 여러 번 충돌을 하셨고 책망의 말씀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떠나라고 하는 말은 마치 예수님의 신변을 걱정해주는 아주 우호적인 말로 들립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전부가 예수님께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 여기를 떠나라고 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3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저는 이 사람이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고 닫힌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행악하는 자’로 규정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달갑지 않게 들렸을 것은 당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실천과 행위를 근거로 해서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떠나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헤롯을 빌미로 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게 하려는 의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속 계시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렇게 보면 이들은 예수가 자기들 곁에 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들 곁에 계시는 것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인정 받고 칭찬 듣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등장으로 그 즐거움이 훼방 받게 된 것입니다. 정결 규례를 지키고 안식일 등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것으로 자기 신앙을 자랑했던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들 곁에서 떠나게 하고 계속 예전의 신앙의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은 속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말하는 그 의도는 ‘당신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야 우리가 즐거울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신앙은 자기만족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내게서 떠나기를 원하십니까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동행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동행해주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동행하면 나의 일을 도와주실 것이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주면서 평안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즉 예수님의 동행으로 자기 인생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또한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일 뿐입니다.

 

◉ 자기만족과 신앙 ◉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눅 11:43)라고 책망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시장에서 뭇 사람들에게 문안을 받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율법과 정결 규례를 철저하게 지킴으로 그들의 신앙이 뛰어남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악하는 자에 해당되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기쁨,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길에는 우리가 원하는 인생의 기쁨이나 만족은 없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헤롯을 빌미로 여기서 떠나가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나의 만족이 되지 않는 예수에 대해 마음이 떠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떠난 자의 상태로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고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염두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바리새인들이 우호적인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떠나라고 했다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약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생명이 되는 분임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헤롯이 죽이려 하니 여기서 떠나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 동의 귀를 자른 것처럼 힘을 모아 헤롯으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했어야 할까요?

 

 

신앙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 해도 끝까지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에 함께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게 ‘여기서 떠나라’고 충고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길에서 나의 기쁨과 만족을 원하고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예수님이 가신 길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더 큰 관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2,33절)는 말씀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위협이 있다고 해도 내가 갈 길을 가겠다는 예수님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길은 바로 죽음이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이 길을 ‘내가 갈 길’로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심으로 십자가 사역이 완성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는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십자가의 길은 나를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하는 길이 아닙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떠들었던 신앙과 얼마나 멀어진 채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길을 가면서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행악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길 ◉

 

34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아들을 반대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만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모으려 했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고 예수님을 반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길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그들 마음에 맞는 메시아를 영접해서 그 메시아로 인해 자신들에게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예루살렘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등장한 예수는 그런 그들 마음에 기쁨도 만족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를 박해하던 예루살렘과의 싸움에서 실패할 것을 알았지만 그 길로 가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실패의 길로 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오늘과 내일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세상이 바뀌고 예루살렘이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셨으면서도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그 길로만 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고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실패하신 것입니까? 예루살렘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애당초 세상과 예루살렘을 바꾸기 위해 일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5절에 보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기쁨과 만족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의 귀에 이 말은 분노를 일으키는 말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세상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세상 현실을 드러내신 것으로 예수님의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면서 마음을 주께 두는 주의 백성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고백이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의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게 되는 사람은 자기 기쁨과 만족이 있는 길을 인생의 성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즉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이 길이 우리의 길로 자리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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