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8.25 09:22

(74강) 높은 자리 낮은 자리

조회 수 485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14:1-11http://onlycross.net/videos/nuk/nuk-140111.wmv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설교>

 

◎ 자기 틀에 갇힌 자 ◎

 

또 다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안식일 문제가 불거집니다. 13장을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허리 굽은 여인을 고쳐주신 일로 인해 회당장의 분노를 산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일을 비난하는 무리들을 향해 ‘너희는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끌고 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라고 지적하시면서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시 안식일에 병 고치신 일로 인해 바리새인과 충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무지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고 예수님과 전혀 다른 길에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늘나라에 계셨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행하심이며,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안식일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안식일을 가지고 안식일 주인이신 예수님을 비난하고 분노합니다. 가짜가 진짜를 향해서 ‘너는 가짜’라고 소리치는 형국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참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아닌 자기의 틀에 갇혀 있는 자들로써 자신들이 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순수하게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에 의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신앙의 권위를 누리고자 한 것입니다. ‘나보다 신앙 좋은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이런 식으로 규례 지키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 세계에서 윗자리에 앉을 자격과 권위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비유의 말씀이 안식일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안식일을 고집하는 이유 ◎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 수종병 든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가 그에게 어떻게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답하셨다는 것은 실제 그들의 어떤 질문에 답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엿보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하자 예수님은 수종병자를 고쳐 보내신 후에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답을 못합니다. 답을 못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타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생각을 바꾸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바꿀 의도가 없었기에 단지 잠잠히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 등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 정당성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규례를 성실히 잘 지킨다는 것으로 신앙의 권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안식일 규례로 인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은 단순히 안식일에 병을 고쳐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 본질의 차이로 인한 충돌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청년으로 있을 때 안식일, 즉 주일 성수에 대해 배운 것은 주일에는 돈을 쓰지 말고, 음식을 사먹지 말아야 하고, TV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먼 사람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와야 했고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사람은 미리 토요일에 와서 예배당에서 잠을 잤습니다.

 

 

돌아갈 때도 월요일에 가야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일 성수가 부담이 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토요일에 와서 월요일에 돌아가는 식의 주일 성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은 늘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어야 했고,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신앙 좋다는 칭찬을 보상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만약 예수님이 차를 타시고 예배당에 오셨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차를 타신 것을 보니 주일에 차를 타고 타지 않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동안의 자신의 공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앞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든 그동안 자신이 지켜왔던 것을 진리로 고집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율법교사고 바리새인입니다.

 

◎ 바리새인의 문제 ◎

 

이들의 문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께 상을 받고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규례를 성실히 지키는 성의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누구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에게 수종병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가 겪는 고통 역시 관심 밖입니다. 그의 고통 보다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규례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통 받는 수종병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을 권위가 있고 높은 자로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앉을 자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늘 서열이 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서열은 사회적인 위치나 권위, 연배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열 순서는 단순히 높고 낮은 자리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과 대립하여 등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과 충돌되다보니 신앙의 요구를 모른 척 하든지 아니면 위선적인 겸손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살아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어떤 모임에 가면 사회적 신분이 높다고 해서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는 겸손을 보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에게 인격이 훌륭한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바른 삶을 위한 행동 지침의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 이러한 겸손을 내세워 자신의 잘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라고 말합니다. 청함을 받은 이들은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청함을 받은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8,9절)고 말씀합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혼인 잔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종병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수종병은 몸에 물이 생겨 붓는 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람이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있었다는 것은 정식으로 초청된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단지 식사 자리였다면 수종병자가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 높음과 낮음의 판단자 ◎

 

그러면 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할까요?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고 영광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신랑 신부의 영광을 가리는 하객일 뿐입니다. 혼인 잔치보다는 자기 영광에 마음을 둔 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씀은 혼인잔치에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잔치 그 자체이고 신랑 신부이지 너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어떤 모임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석에 앉기를 거부하는 겸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이지 영광을 누릴 자신에게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영광을 누릴 자신에게 마음을 두기 때문에 결국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에 대한 다툼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청한 자가 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혼인 잔치에서의 자리는 잔치 주인이 정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리새인이 스스로를 높은 자로 여기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이 자기 기준으로 스스로를 높다고 여기는 그것이 부끄러움과 함께 끝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낮아짐의 의미 ◎

 

바리새인은 자기 영광을 위해 안식일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이 수종병자처럼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신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자로 보았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권력이고 돈입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열심 있는 신앙생활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에서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가장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기에 관심을 두면 됩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야 할 자세입니다.

 

 

사람은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조차 자기 인격과 신앙을 보여주고자 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인격이 훌륭하고 신앙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본성이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 것은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알고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살았고 접했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여러분 자신의 영광은 전혀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의 영광의 세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관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영광,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마음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늘 자기 영광을 세우려고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트집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기뻐하며,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어도 감사하게 되는 그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높은 자로 여김 받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3.09.01 391 누가복음 (75강) 청할 사람 신윤식 4445
2010.02.08 390 마태복음 (75강) 아버지의 뜻 신윤식 6381
2015.08.22 389 에베소서 (75강) 성령의 충만 신윤식 3564
2018.10.20 388 고린도전서 (75강) 머리 신윤식 1313
2010.02.01 387 마태복음 (74강) 신앙의 본질 신윤식 6327
2015.08.15 386 에베소서 (74강) 세월을 아끼라 1 신윤식 3604
2018.10.13 385 고린도전서 (74강) 본받는 자 신윤식 1558
2013.08.25 » 누가복음 (74강) 높은 자리 낮은 자리 신윤식 4857
2018.10.06 383 고린도전서 (73강) 영광을 위하여 1 file 신윤식 1416
2015.08.08 382 에베소서 (73강) 어둠의 일 신윤식 3565
2010.01.26 381 마태복음 (73강) 신앙과 놀이 신윤식 5703
2013.08.18 380 누가복음 (73강) 내 길을 간다 신윤식 4508
2010.01.18 379 마태복음 (72강) 침노 당하는 천국 7 신윤식 6817
2013.08.11 378 누가복음 (72강) 좁은 문 신윤식 4634
2015.08.01 377 에베소서 (72강) 빛의 열매 신윤식 3562
2018.09.29 376 고린도전서 (72강) 내가 아닌 그 file 신윤식 1222
2010.01.11 375 마태복음 (71강) 요한의 의문 신윤식 5802
2015.07.25 374 에베소서 (71강) 빛의 자녀 신윤식 3539
2018.09.22 373 고린도전서 (71강) 남의 유익을 구하라 file 신윤식 1678
2013.08.04 372 누가복음 (71강) 겨자씨와 누룩 신윤식 451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