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7.19 11:29

(6강) 복음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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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7-12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207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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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사랑의 관계는 어떤 약속된 장소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고 먹는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오랜 세월을 한 공간에서 어울리고 함께 했다면 친분관계는 이뤄질 수 있고 인간의 정이라는 것도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닙니다.

 

 

사도는 8절에서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과장된 말처럼 들리지는 않습니까?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겨우 3주간 복음을 전하고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로 인해서 그 곳에서 도망치다시피 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로 다시 방문 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과 많은 시간을 교제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3주의 기간으로 누군가와 아주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사교성이 있거나 3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3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수련회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자기들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날과 시간에 회당으로 모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친분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단지 보고 싶다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도 너희를 위해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성도와 이런 관계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 하여 친분관계를 이뤘다고 해도 결국은 남남이라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친한 관계라고 해도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타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는 것도 기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바울이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에게 사랑하는 자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사랑의 관계를 알게 되면 형제를 위해 목숨을 주는 것도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러한 말에 대해 부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사도와 같은 말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는 과연 은석교회 신자들에게 목숨을 주기를 기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면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우리와 달라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지만 바울은 믿음이 우리보다 더 강해서 목숨을 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실제로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준 일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말만 했을 뿐, 실제로 행동되어진 것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목숨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준다고 해도 그 대상은 오직 한 사람일 뿐입니다. 목숨을 내어 준 후에 다시 부활해서 또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면 바울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는 단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바울의 말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바울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제 목숨까지도 여러분에게 주기를 기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고, 바울이 아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울이라는 인간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바울의 믿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즉 바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것을 대신 죽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런 식의 죽음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끝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는 자기 자신감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순간의 자기 느낌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주기를 기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사랑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즉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신자가 이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이 사랑으로 형제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를 위해 한 것이 없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실행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실행을 해야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도는 형제를 위해 실제로 목숨을 준 일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런 말을 할 때도 바울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실제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이 없는데도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자기 믿음으로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믿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말합니다. 그 믿음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를 보게 하는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자기 생존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생명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랑의 관계에 있는 신자의 영혼을 바라보는 바울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신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신자를 대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의 성품으로 보지 마십시오. 바울의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그 사랑을 내어 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권위는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만날 뿐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면 항상 자기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리고 받을 자격과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의 실상입니다. 목사라는 권위를 가지고 신자들을 상대하려고 합니다. 권위를 주장하면서 그에 합당한 대접을 요구합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심판을 받아야 할 자신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접하셨는가를 알 것이고, 저주의 자식인 자신을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으로 대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결코 목사라는 권위를 앞세우고 주장하면서 신자들을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장할 어떤 권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봉사의 직무이지 권위를 주장하라는 지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지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는 신자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도는 교회를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즉 돈 문제가 개입되지 않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교회로부터 쓸 것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빌 4:16절을 보면 빌립보 교회가 사도의 쓸 것을 보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헌금을 모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즉 사도는 사도가 교회로부터 쓸 것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신을 위해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간 것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갔을 뿐이고, 그 사랑에 의해서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복음만을 내어 놓았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신자의 관계입니다.

 

 

목사와 신자가 돈이 개입된 관계로 만나게 되면, 신자는 목사의 생활비가 부담스러워지고, 목사는 받는 생활비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1,12절을 보면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를 사랑할 자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그 사랑을 내어놓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부터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형제를 여러분이 받은 그것을 내어 놓아야 할 지체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이 형제에게 목숨을 주기를 기뻐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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