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6.27 16:26

(67강) 성령의 근심

조회 수 345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엡 4:30-32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303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설교>

 

30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근심을 우리 기준으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신앙생활, 즉 주일 성수나 기도 등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성령이 근심할거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자기 성경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해 기존의 생각이 무너지고 새로운 생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고 깨달음인데 이 지혜와 깨달음이 없다면 우린 항상 우리가 간직하고 붙들어 온 신앙 세계를 기준하여 성경을 접근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근심에 대해서도 우리가 평소 갖고 있던 신앙의 근심을 그대로 대입하여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을 자신의 틀로 기준화 하고 율법화 하는 대단히 심각한 착각일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신앙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 앞에서 언급되었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분을 품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는 말들을 도덕의 틀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도덕의 틀 안에서 생각해 온 버릇 때문입니다.

 

 

사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신자를 도덕적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 의도가 아니며 그렇게 하면 신앙 좋은 신자고 하지 않으면 신앙이 좋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그런 구별로 나눈 적이 없습니다. 사도는 다만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 가고 있는가를 나타내고자 할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말하는 성령의 근심은 신자의 방향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신자의 방향성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립니다.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길의 끝이 생명이고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다니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 생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문제와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불필요하고 교회로 모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자체가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길에서 하나님을 인생의 방향으로 정하고 살아가는 가운데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를 목적으로 하고 교회가 방향이 되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이 근심하신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엡 4:1-3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하신 일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지 못하고 분을 내고 도둑질하고 악독, 노함, 떠드는 것, 이방 이 모든 것이 서로 지체가 된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후로 서로 나누어진 관계로 존재합니다. 각자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나누어진 관계가 원상회복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한분으로 인해 묶여진 관계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의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지체와 지체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몸에 속해 있는 것으로 하나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 된 관계를 지키는 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는 것으로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방향으로 하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둘 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고백과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용서를 깨닫고 서로를 용납하게 되고 은혜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있기에 교회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교인들끼리 잘 지내고 서로 친절하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하나 된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 되고 사랑으로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은 호수는 잔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낙엽이 하나 떨어져도 파문이 일고 그 파문은 옆으로 퍼지게 됩니다. 인간관계는 절대 신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인들끼리 잘 지낸다는 것은 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 됨의 증거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조그만 사건 하나로 산산조각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일에 대해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성령 안에서 동일한 길을 함께 가는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약한 자가 있고 따라오지 못한 사람이 있고 실수한 사람이 있으면 잘라 버리고 나 혼자 잘 가면 되는 길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서로의 짐을 지며 함께 가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30절 뒤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 안에서 구원이 확정된 관계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확정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과는 무관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자기 행함에 대해 내세울 것이 없다는 뜻이고 서로의 행함을 판단하고 비교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로 확정된 구원이기 때문에 서로의 잘못과 실수로 노하고 분내고 떠들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멸시하는 악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악의를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친절하게 하는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 관계를 지키지 못할 때 나와지는 것은 악독과 분냄과 비방과 떠드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비방과 판단과 남의 약점을 떠드는 것들이 나온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를 멸시하고 있는 증거로 봐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여러분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분을 낼 때 맞서 보복하려고 하기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 서로 지체가 된 관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있어야 할 싸움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무시당한다는 것보다 예수님의 용서가 멸시된다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됨을 위해 부름 받았고 하나 됨으로 묶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안다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용서를 알고 용서로 인해 감사하는 여러분이 지체를 만났을 때 무엇이 나와지는가를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고 가시와 같은 지체를 만났을 때 악독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이 나온다면 용서를 감사한다는 여러분이 용서의 존귀함을 멸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에 뜨시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길로 함께 가는 관계로 드러나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5.07.18 371 에베소서 (70강) 헛된 말 신윤식 3292
2010.01.04 370 마태복음 (70강) 신자의 가치 4 신윤식 6853
2013.07.28 369 누가복음 (70강) 사탄에게 매인 자 신윤식 4817
2018.09.15 368 고린도전서 (70강) 강한 자 file 신윤식 1285
2010.12.05 367 데살로니가후서 (6강) 전통을 지키라 신윤식 4819
2012.04.15 366 누가복음 (6강) 예수님의 탄생 신윤식 6133
2017.06.10 365 고린도전서 (6강) 십자가의 도 신윤식 2866
2010.02.01 364 골로새서 (6강) 복음의 소망 신윤식 4842
2010.07.19 363 데살로니가전서 (6강) 복음과 사랑 신윤식 4986
2014.03.16 362 에베소서 (6강) 구원의 이유 신윤식 4288
2013.07.21 361 누가복음 (69강) 회개하지 않으면 신윤식 4743
2018.09.08 360 고린도전서 (69강) 우상 숭배 file 신윤식 1428
2015.07.11 359 에베소서 (69강) 성도에게 마땅한 일 신윤식 3355
2009.12.29 358 마태복음 (69강) 복음으로 사는 길 은석교회 8785
2015.07.04 357 에베소서 (68강) 하나님을 본받음 신윤식 3435
2018.09.01 356 고린도전서 (68강) 시험 file 신윤식 1386
2013.07.14 355 누가복음 (68강) 불이 던져진 세상 신윤식 4933
2018.08.25 354 고린도전서 (67강) 피할 길 file 신윤식 3068
2013.07.07 353 누가복음 (67강) 준비하고 있으라 신윤식 4694
2015.06.27 » 에베소서 (67강) 성령의 근심 신윤식 3458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