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7.04 20:02

(68강) 하나님을 본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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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2http://onlycross.net/videos/eph/eph-05010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설교>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하나님을 본받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고 오늘 우리를 향한 요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본래의 요구로부터 얼마나 무관하게 멀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라고 말하고 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본받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행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가치 없는 것으로 하락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고 행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 아래 있다면 자연히 나타나게 되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사랑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행해지고 있음을 먼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와질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람에게서는 나와 질 수 없는 것으로 열매 맺고 그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본받는 것과는 무관하고 교회됨의 본질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를 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이해될 수 없고 마치 구제라고 하는 신앙의 덕목을 무시하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생각과 동떨어져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도와주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려운 형편에 처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신자인 여러분을 도구 삼아 어려운 형편의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요구라면 교회도 우리도 주어진 것들을 모두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구제를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 실천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가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많이 강조되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은 오히려 기독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들의 행함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문제입니다. 그분들의 행함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덕목으로 진단하고 그것이 곧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현대 기독교의 잘못이고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물질적으로 도와주시고 편한 삶이 되게 하는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원한 것들이 채워지는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받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고 생각하는 그런 사랑을 주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일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노아는 착했고 나머지는 모두 악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홍수로 심판 받은 사람들 속에도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은 있습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이 홍수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봐도 당시의 사람들은 특별히 악하다고 할 것 없이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설사 그러한 생활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어울린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대의 모두를 심판하시고 노아의 가족만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될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를 택하셔서 심판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 사랑을 입었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나타났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실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쉬지 않고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사랑의 본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무능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본받아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 지체의 관계로 함께하는 교회에 나타나야 할 사랑의 모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같은 교인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일까요? 그것으로는 목사를 만족하게 하고 여러분께 만족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만족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타날 사랑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라는 말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고 말하는 그 취지를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어’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전부이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나에게 사랑이 주어졌다면 그것으로 신자는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알고 누린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기쁨과 감사를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신자는 서로에게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서로 알게 하고 나눔으로 사랑을 함께 누리고 공유하는 관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가 말하는 교회이고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함께 하기보다는 서로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욕망의 존재로 만나고 함께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른 바가 아니고 고백하고 감사하기도 하는데 왜 그렇게 인간의 악한 모습만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본받는 요구에 둔해지고 자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생각 없이 교회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히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러한 요구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악한 모습들 하나하나가 나의 의를 포기하게 하고 누구와도 차별될 수 없는 동일한 불의와 더러움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하게 되면서 지체의 관계에 있는 신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고 동일한 길로 이끌림 받고 있는 한 몸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행함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에 대해 우리는 무능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발견해야 하는 것이고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은 이것을 간과함으로 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은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증거해야 하는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내가 준 것을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관계에서 드러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 아래 있는 교회가 교회의 부흥이나 교회의 영광을 얻는 일에 힘을 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본 받아’라는 요구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셨다면 신자는 믿음이 좋은 사람, 좋지 않은 사람,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으로 나눠질 수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봉사 헌신 등의 여부로 신앙이 차별될 수 없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사랑을 받은 자녀로 부르시고 서로 지체의 관계로 묶어 놓은 이유를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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