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7.11 17:10

(69강) 성도에게 마땅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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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3-7http://onlycross.net/videos/eph/eph-0503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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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설교>

 

신자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드러내고 증거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1절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계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의 것을 풍성히 채워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사랑을 받아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꿈꾸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이 잘되는 사랑을 받은 것이고 잘못되면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일들은 소위 사랑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특정인들의 몫이 될 뿐입니다. 반면에 힘들고 어려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마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 됩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에 세상 조건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편안하게 살기 때문에 사랑을 더 받았고 힘들게 살기 때문에 사랑을 덜 받았다는 것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어쭙잖은 인간의 생각과 욕망으로 멸시하고 값싼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한 생각일 뿐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이런 악함을 끌어내기 위해 편한 삶을 주실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고 희생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정말로 무의미합니다. 사랑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다면 잘 살든 못 살든 모두가 진노의 자식일 뿐이고 잠시 후면 흙으로 돌아갈 인생일 뿐입니다. 또한 사랑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만 크게 다가올 뿐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관계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의 관계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성도에게 마땅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3절, 4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말합니다.

 

 

성도에게 마땅한 것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은 성도에게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이것들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은 우리의 더러운 속에서부터 나와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인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우리의 혀로 인한 것인데 혀 역시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의 악함이 혀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인데 더러운 속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말은 할 수 있습니까? 아마 할 수 있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평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산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주어진 상황이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납득이 안되고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껏 감사의 말을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따라 살아왔고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의 말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었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께로 끌어 오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날 위해 살아왔을 뿐인데 하나님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나를 진리로 이끄시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 받아’라고 말씀하심으로 신자가 어떤 사람으로 어떤 자리로 부름 받았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방식이 우리의 삶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순간도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체로 함께 하는 성도의 관계에서 누군가의 허물과 죄에 대해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셨음을 전하는 것이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고 성도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여러분께 어렵게 다가올 거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을 버리고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도 하지 말고 성도로써 마땅한 삶을 사세요’라고 하는 말이 오히려 쉽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인간의 행함과 실천에 길들여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듣기에는 쉽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해주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성도로써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행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삶에 힘쓰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속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을 통제하고 제거할 힘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아예 더러운 것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더러운 것을 자기 자랑으로 내세웁니다. 이러한 수준의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마라’는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뜻을 성취해주는 것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고 인간의 뜻과 연관된 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뜻을 위해 일하셨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죄 용서가 인간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전혀 필요하지 않는 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없으면 안되는 것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지금의 여러분을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적게 받은 사람으로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수준에 있어서는 누가 낫다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할 것은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허물과 죄에 대해 서로가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에 대해서는 눈 감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판하고 판단할 자격이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인을 죄인의 신분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은 성도에게서 나와져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가게 하시는 길은 우리의 이름과 영광과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버려지고 다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이 세워지는 길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기 위한 도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신자는 서로 자신을 드러낼 관계로 함께 하지 않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서 드러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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