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7.14 10:11

(68강) 불이 던져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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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49-59http://onlycross.net/videos/nuk/nuk-12495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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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와는 거리가 멀고 모든 일에 인내하시면서 어떤 잘못도 받아주시는 아주 인자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붙들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죽임을 당하신 온유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분노하시고 책망하신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빌미로 해서 신자가 분노하고 책망하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분노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분노와 책망은 늘 감정적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와 책망은 우리와 같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서는 예수님과 같은 분노와 책망이 나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온전히 진리 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의 입장을 앞세웁니다.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노와 책망으로 누군가를 다스려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와 책망의 대상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기에 진리에서 벗어난 자에 대한 분노와 책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 ◉

 

본문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깨뜨려 버립니다. 여러분은 화평이 아니라 분쟁하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이해되십니까?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근거 삼아 교회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당연한 것으로 말합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사람끼리의 분쟁을 마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인 것처럼 강조하고 분쟁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며 군중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분쟁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고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는 말씀이나 지옥이 불의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불을 세상에 던져 심판하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지금의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붙들어 죽이고자 하는 악한 세력을 불로 심판하셨어야 하고 따라서 지금의 세상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은 세상 마지막 때 실현될 불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말씀에 근거하면 세상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이미 불이 던져진 상태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심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인 세상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선포하는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던져진 심판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심판을 세상이 끝장나는 재앙의 의미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주인의 자리에 앉아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세상은 이미 불이 던져진 상태와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불이 던져진 상태로 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불이 던져진 상태로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의 문제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누리는 것으로 인생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불이 던져진 상태로 바라보는 신자는 무엇을 염두에 둘까요? 불이 던져진 세상에서 자신을 구출할 자로 오신 분께 마음을 둘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출발하기 전 승무원이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취할 행동에 대해 교육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승무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승무원의 교육은 실제로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라면 모두 생명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구명조끼가 보관되어 있는 곳과 사용 방법 등도 비행기가 바다에 내렸을 때 나를 살리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탄 비행기에 심각한 비상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무원의 교육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고 오로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자기 여정에만 마음을 쏟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승무원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앞에 서서 산소마스크를 입에 대고, 구명조끼를 입으며 사용 방법에 대해 설명하지만 승무원에게서는 비상상황이라는 심각함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얼굴엔 웃음을 띠고 건성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만 듭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승무원도 자신이 탄 비행기가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승무원도 승객도 서로가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해 말하고 듣고 있는 것이 비상사태에 대한 교육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복음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불이 던져진 세상의 심각함과 함께 신자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을 말하는 자는 듣는 자가 세상을 전혀 심각한 상태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한다고 하나 건성으로 말하게 되고, 듣는 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여정, 즉 무엇을 먹고 마실까에 대한 인생에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예수님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십니다.

 

◉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 ◉

 

50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받아야 할 세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또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하시며 이 세례는 누구로부터 받는 것일까요?

 

 

이것은 눅 3:16절의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 앞에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세상을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상태로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해서, 즉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된 신자는 불이 던져진 세상의 실상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이 불이 던져진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헛됨을 알게 되고 마음을 헛되지 않은 주의 일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된 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는 관계가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화평이 깨어진 관계임을 뜻합니다. 즉 분쟁이 이미 발생한 현장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된 사람으로 함께 한다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같을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관계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 ‘헌신하라’‘봉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십자가의 정신에 의해서 사랑과 봉사와 헌신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이 던져진 세상의 현실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늘 엉뚱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십자자의 죽으심을 아는 것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에 더 중요성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구하고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종교의 모습만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접하고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평화롭고 조용하다고 해도 실상은 불이 던져진 상태이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실상이 참된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처럼 인생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얼마 모았든 어떤 자리에 올랐든 그것으로 인생의 가치를 논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불이 던져진 세상에서 인생은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되었는가를 평가되고 그 가치가 드러날 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즉 십자가만이 불 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을 던지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의 세상의 심각성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심각성이 실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 몰두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예수님은 답답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 분간해야 할 세상 ◉

 

56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하고 남풍이 불면 덥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풍은 남동쪽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 지방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가리킵니다. 뜨거운 바람이 부니 덥겠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구름을 몰아서 소나기가 내리게 하시고 남풍을 불게 하셔서 덥게 하시는 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몰려옴으로 소나기가 내리고 남풍이 불어서 더운 것을 단지 자연 현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볼 뿐이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불이 던져진 세상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소나기가 내리고 남풍이 불어 더운 것도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면 불이 던져진 세상의 실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눈에 비취는 세상은 분명 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에 취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가득하며 모두가 자기 성질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다스려 오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심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빚진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화해자로 보내셔서 심판의 길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던져진 세상을 사는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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