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7.21 09:42

(69강) 회개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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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1-9http://onlycross.net/videos/nuk/nuk-1301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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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설교>

 

◉ 인간에 대한 이해 ◉

 

세상이 생각하는 신의 질서는 선한 사람은 복을 누리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신에게 원하는 것이고 신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질서에 어긋나는 사건,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신을 원망하면서 그 존재 또한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일단 인간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선한 사람이 있다면 복을 받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에 선한 사람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선한 사람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때문에 누가 선한 사람인가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준에서 제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다면 그는 악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저렇게 착한 사람을 어떻게 악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항의는 무의미합니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왜 추방당했을까요? 하나님이 처음 창조 하신 인간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선악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선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자신을 보게 됨으로 선악을 자신을 기준으로 구분할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선언하시고 에덴에서 추방하셨으며 생명나무 또한 감추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 이후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된 인간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선하다는 일컬음을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 이후로 누구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인간상을 보여준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 이후로는 하나님께 선하다는 선언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최종적인 결론은 ‘누구도 자신의 선함으로 인해 복 받을 자격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합니다.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맞는다면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원망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복을 받고자 기대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도 이점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복에 집착을 하는 것은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믿음은 자기 부인과 함께 주를 바라보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믿음을 내세워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일이 잘되면 믿음이 좋아서 복을 받았다고 하고, 일이 잘못되면 믿음이 좋지 않거나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도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함께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간파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

 

1절을 보면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반로마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그런 갈릴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들을 잡아다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피를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 바치던 제물의 피에 섞은 악행을 얘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절)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죽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하시고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학살 당한 사건이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셨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생하여 왔습니다. 6.25전쟁 때 경찰관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또는 지배계급이라는 이유로 북한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고 심지어는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한 마을 사람들이 아군에 의해 몰살당한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해일로 수십만 명이 죽고 수많은 사건 사고로 여러 사람이 죽는 일을 매일 뉴스로 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자로서 그 같은 죽음의 소식을 접할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학살과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두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죽음의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사건을 대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회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학살을 당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대가 무너져 십 수명이 죽은 사건도 큰 사고입니다. 며칠 전에도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다섯 명이 바다에서 죽은 사고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사건이나 사고 소식을 접해도 무감각으로 반응하기 일쑤입니다. 흔히 발생하는 사고 중의 하나로 여기며 ‘안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죽음을 죄로 인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로, 또는 자연 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기에 그 같은 불행한 일을 겪게 된 원인을 죄로 인해 신에게 벌을 받은 것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욥이 한순간에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일도 세상 시각에서 보면 큰 불행을 겪은 것입니다. 그 불행의 이유를 욥의 세 친구는 죄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요 9장에도 보면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 입니까?’라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도 한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죄의 탓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에게 발생한 일 역시 죄의 탓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사건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마땅치 않자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서 많은 백성들이 죽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죽음으로 징계하신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죄의 탓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잘 사는 것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된다면 하나님께 죄 지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유치하고 얄팍하며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 회개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붙들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은 예수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내가 받아야 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사건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받아야 할 죽음에서 나의 죄를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즉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회개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말하면서 회개에 대해 말씀합니다. 즉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서 회개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죽게 하신 일에 대한 원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생명에서 단절된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아니하면’라는 말씀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로 인한 참혹한 일과 죽음들을 단지 그 일을 겪는 사람들의 죄의 결과나 불행으로만 보지 말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깨어 있는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기 위한 일들로 바라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6절부터 주인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나 얻지 못한 일로 찍어 버리겠다고 한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구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치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는 것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 사고입니다. ‘나는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니 복 받았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저처럼 비참한 죽음에 처해져야 할 인간일 뿐이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있다면 남겨 놓겠다는 것이 주인의 의도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맺기 위해 일하시겠습니까?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면서 가꾸고 기다리는 것이 열매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회개가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죄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갈릴리 사람의 죽음과 망대 사건과 같은 일을 통해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혜만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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