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7.21 16:06

(62강) 복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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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설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근거를 오직 복음에만 두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실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 끝나는 인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라는 고백에서도 바울의 그러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되었기에 다만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 본문의“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3절)는 말에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복음에만 두고 있었기에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복음이라는 중심적인 문제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복음을 중심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문제를 복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자기의 입장과 경험과 지식을 근거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다툼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가 복음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한다고 하면서 다툼으로 향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비록 복음을 전한다는 선한 의지와 뜻을 가지고 있다 해도 충돌하는 것이고 심한 경우에는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툼과 충돌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행 15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전도 여행길에 심히 다투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별 것 아닐 것 같은 문제로 다투고 갈라선 것입니다.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반대한 것은 마가가 처음 전도 여행길에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바울이 조금 양보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서면서까지 반대할 이유가 없는 사소한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든 문제를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면서 사소한 것은 양보하고 중요한 것은 양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문제를 그렇게 구분하면서 대처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 해도 결국 자기의 성격과 기질로 반응하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이 오해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을 받으면 이러한 성격과 기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격과 기질 자체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성격과 기질이 어떠하냐?’가 아니라‘무엇을 위해 사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본문의 내용을 바울의 변화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같이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되었다는 말이 마가를 용납할 수 없어서 바나바와 다툰 바울과는 달리 아주 온화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에 가기 전과 후의 바울을 비교하면서 뭔가 다른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변화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해석은 바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무시한 채 자기 말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은 바울이라는 존재 자체가 복음에 매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심정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심정이 되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 의미를 세상에서 찾고 싶어 하는 우리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바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됩니다.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얻는다는 뜻은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것도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람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 18:15절에 보면“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형제를 얻는다는 것은 형제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육신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권고의 말을 받아들이는 영적 형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순히 윤리와 도덕에 저촉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해 노력을 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하는 것에 죄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 권고할 때 죄를 죄로 인식하고 권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발생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주의 간섭이고 주께서 부르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주를 바라보게 되는 자가 형제이고 그러한 형제가 있게 되는 것이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한다고 말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의 세계에 참여하여 복음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영적 형제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관심은 복음을 위해 행하는 자신이 아니라 복음의 형제를 얻는 것으로만 향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참여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구원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된 자로서 함께 복음의 은혜를 나누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22절의“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는 말에서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여러분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생각한다면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위한다는 것이 명분이 되고 힘이 되어 자기 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나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자부하면서 복음을 위해 행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위하여 행하는 것임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한다는 자신만 있을 뿐,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며 자신 역시 복음에 의해서 복음에 참여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대해 바울은 앞에서 말씀드린 롬 1장에서 자기의 복음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로 자기를 위한 복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바울 자신을 간섭하고 장악하며 사용하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의해서 복음에 참여되는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참여됨으로써 복음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형제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20-21절의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0-21절)

 

 

바울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능하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친한 관계를 유지해서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초점을 둔 사탄의 생각일 뿐입니다.

 

 

소위 전도 훈련을 하는 곳에서 가르치는 효과적인 전도 방법에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가령 이웃이 이사를 오면 이삿짐을 함께 옮겨줌으로써 좋은 이웃이라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나중에 전도에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업을 하는 분들의 전략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전도와는 무관합니다.

 

 

아무리 좋은 인간관계라 해도 그것은 복음과는 무관합니다. 복음은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 같이 되기도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 같이 되기도 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고자 하는 인간관계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으로 말합니다. 유대인과 같이 된 것도,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도, 율법 없는 자 같이 된 것도 그들 모두에게 종이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으로 바울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확고한 주관이나 원칙도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기회주의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평가와 판단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복음도 전하는 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복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기에 자기 유익이 아니라 복음의 유익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참된 자유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 같이 된 모든 이유가 그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알고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복음을 나누는 형제로 얻기 위한 것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러한 행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 16:3절에 보면“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복음을 전하는 길에 데리고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굳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에게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나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이 온전케 되었음을 알았기에 굳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한 것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자는 더러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하지 않은 디모데를 데리고 유대인들에게 간다면 분명 비난을 받고 거부당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유대인들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 같이 되었다는 말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는 자신의 사도됨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조차 매이지 않은 바울의 자유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참여되는 구원 그 이상의 것을 원한 바가 없습니다.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복음에 대한 지식 있는 자로 인정받는 것에도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복음을 위하여 모든 행하고 복음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을 얻어서 함께 복음의 은혜를 나누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붙드는 복음의 의도였기 때문에 유대인 같이 행하고 율법 없는 자 같이 행하는 것 때문에 어떤 비난과 대우를 받든 개의치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다만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유익에만 마음을 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오직 복음에 의해 사용된다는 바울의 자기 입장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에 담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여 은혜를 나누는 형제를 얻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현재의 자기 자리에서‘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가 율법 있는 자리일 수 있고 율법 없는 자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이 있는 자로 십자가에서의 자기 죽음을 알고, 율법이 없는 자로 역시 십자가에서의 자기 죽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있는 자로 행하고 율법이 없는 자로 행하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툼의 이유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에 의해서 복음에 참여된 자들이 복음의 복과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그들이 각기 무엇을 행하든 신자 됨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죄인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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