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5.23 20:29

(62강) 새 사람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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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7-2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22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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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설교>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을 하지만 솔직히 그 말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감에서 나온 말일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바라보고 믿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현재의 모습으로는 살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하는 말들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수준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복음도 듣기 좋은 말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현대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폐단에 분노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해석되고 전파되는 설교에 대해서도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를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복음이라고 생각되는 설교를 들었을 때 그 교회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라고 생각되는 말에 익숙해지게 되고 익숙해져 있는 것으로 마치 자신이 복음적인 사람이 되었고 복음으로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이 듣고자 했던 말을 들은 것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인지 복음이 아닌지 듣고 분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복음적인 사람이고 복음으로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 복음이 생명이라는 것도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지향하는 것을 본인도 바라보게 되고 복음이 인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분별을 하는데 복음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사는 것을 24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새 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그 삶의 길로 가기를 여러분께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전보다 더 나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도덕과 윤리적으로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는 늘 죄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폭발한 화산에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죄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린 단지 흘러나오는 죄를 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죄를 바라보면서 죄가 흘러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 아래 있는 것으로 거룩한 자녀로 인정되며 생명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새 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시고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짐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 역시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기준이 세워져 있고 그 기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을 입은 자가 모였을 때도 세상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꼭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 이야기를 한다 해도 누리지 못한 아쉬움과 누리고 있는 자랑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헛된 것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도 역시 생명은 예수님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복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새 사람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두게 되면 그 기준에 맞춰서 새 사람 됨을 평가하고 판단하려고 하게 되기 때문에 새 사람이 짐으로 다가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가령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25절)는 것을 새 사람의 기준으로 세워두게 되면 자신이 참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새 사람에서 멀어진 것 같은 생각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26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내용도 분을 내었다 해도 왜 품고 있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속히 화해하는 것으로 새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삶의 노선이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 방식으로 살아갈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배운 사람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옛 사람의 길의 헛됨과 허망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옛 사람의 길을 좇고자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전히 옛 사람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운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말을 즐기고 말만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만 있을 뿐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린 말씀은 십자가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기에 힘을 썼고 비록 여러분의 귀에 달갑지 않은 말이라고 해도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그대로 전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십자가로만 전해지는 설교에 대해 여러분이 식상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제 설교를 단지 복음적인 말로만 들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현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죄만 흘러나오는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현실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 십자가 이야기가 식상하게 들릴 수 없습니다. 죄가 흘러나오는 나를 생명에 있게 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 7:21-23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로 책망하신 대상은 스스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자처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봐도 신앙이 있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는 거부당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주여 주여’라고 외치기만 했지 행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분명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행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말뿐이고 사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것은 자신에게 집착한 자들의 외침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불법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고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행했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십자가의 은혜는 익숙한 말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신비의 세계로 다가오게 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옛 사람을 벗기 위해 예전에 행하는 나쁜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은 그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인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다면 자연히 관심은 자신을 새롭게 지으신 분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새 사람을 입었고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았기에 그 사랑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을 25절부터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새 사람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해서 성품적이나 환경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의 변화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생명의 하나님께 속하게 된 존재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던 우리를 화목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것에 초점을 두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을 입게 된 저와 여러분에게 펼쳐진 인생의 남은 길입니다.

 

 

교회는 새 사람을 입은 자로 동일한 인생길을 갈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가 나타내야 할 것은 은혜며 사랑입니다. 나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가 증거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길이고 새 사람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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