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6.02 10:41

(63강) 시인과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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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6-12http://onlycross.net/videos/nuk/nuk-1206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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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설교>

 

◉ 교회와 예수님의 용서 ◉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증거가 있는 것이 당연하며 만약 그리스도의 몸 된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증거는 머리 되신 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스림을 받는 것은 머리되신 분의 말씀에만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머리 되신 분의 말씀에 온전히 종속되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거나 힘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개념으로 유지되고 있을 때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로만 발생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로로 발생한 지체라는 증거는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공로는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철저히 부인하면서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에만 마음을 집중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사람의 수의 민감할 필요가 없는 것도 예수님은 사람의 수에 따라 교회를 차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한 두 세 사람은 예수님의 용서를 그 마음에 품고 있는 두 세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수만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해도 예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만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사실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부풀리는 것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두세 사람보다 더 많은 수를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을 보면 실상 교회의 만족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확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죄이며 예수님은 이것을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몸집이 크건 작건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천국가지 못할 자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악행 때문에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옥에는 소위 착하다는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도 수두룩합니다. 착하다는 인정을 받아도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용서로 마음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집중한 채 자기 확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용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애당초 교회로 나오면서 예수님의 용서를 알고 그 은총을 누리는 것에 뜻을 두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 용서는 귀찮은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생명의 세계의 신비함을 깨닫고 그 생명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경험과도 상관없는 말 그대로 무늬만 신자인 종교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확대로 인한 만족과 기쁨은 결코 길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 자체가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사 자기 확대로 인한 만족과 기쁨과 성취감을 누린다고 해도 결정적인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고 죽음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분이 있기에 그 분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도 권세 있는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는 겉으로 드러난 세계에서만 통용되고 육신의 문제에만 관여할 뿐이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세상 권세가 우리의 육신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영혼까지 억압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고 있는 신자라면 비록 육신을 억압할 수 있는 권세라고 해도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고 해서 자기 확대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린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더 잘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아이가 다른 집 아이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면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자기 확대와 자식의 성공을 꿈꾸며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있는 신자라면 자기 확대가 인간의 환상이며 허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기 확대에 집착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 귀한 존재 ◉

 

세상은 돈이 사람을 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대상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참새와 빗대어서 말씀합니다. 참새는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정도로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무가치한 참새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는 것은 머리털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실 정도로 자기 백성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면 과연 귀한 존재에게 무엇을 주시고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하늘의 좋은 것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존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권세 가진 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가진 자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권세를 가지고도, 세상의 좋은 것을 쌓아 놓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갈 수 없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자와 귀하지 않은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을 홍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홍해 사건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이고 죽임을 당한 자들은 애굽 군대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기 때문에 구원하셨고 애굽은 택하지 않은 이방 민족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그런 의미로만 생각하게 되면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은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로 인해 장자의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은 어린양의 피의 효력 아래 있게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의 효력으로 인해 모든 더러움이 가려지고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 받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더러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이스라엘을 귀하게 여기시고 홍해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애굽 군대가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더러운 존재이고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피의 효력으로 거룩하게 된 이스라엘은 비록 세상 기준으로는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라 해도 귀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실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의 은혜에서 벗어난다면 그들 역시 이방인과 동일한 존재로 취급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면서 가나안 민족의 풍습을 따르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민족의 풍습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대를 위해 살고 자기 확대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교회를 성실하게 나오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선행을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런 삶들이 있어야 하고 바람직한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왜 신자입니까? 예수님의 피라는 은혜의 세계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신자가 분명히 인식하고 알게 되는 것은 천국의 길에 세상의 것은 무가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더러운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게 한 예수님의 피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인해서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피의 효력이며 용서로 인해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용서를 가장 복된 은총으로 마음에 두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도, 부러움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용서의 은총을 말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며 외식입니다.

 

 

물론 신자도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의한 집착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의 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으로 여긴다면 단언컨대 머리 되신 분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 예수님을 시인한다면 ◉

 

예수님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절)고 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무엇이고 부인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기독교인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시인하는 것일까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종교를 시인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로써 우리를 거룩한 세계로 이끌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존귀한 은혜며 선물임을 믿고 그 믿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면 그는 세상이 복으로 여기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러운 자신을 거룩한 자로 일컬음 받게 한 용서의 은총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며 그 속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라면 자연히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보다 세상이 복으로 여기는 것을 복으로 간주하고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면서 세상의 복으로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당할 자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면 이 같은 사실을 낱낱이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내용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사명에 충성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일에 뜻을 두어야 하는 것이 교회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절)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로 말씀합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용서가 아니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용서야 말로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존귀한 은총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것을 복으로 간주하며 예수님의 용서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야 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용서를 존귀한 은총으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은총이 아니면 그 결국은 지옥일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람은 늘 용서의 은총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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