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6.23 09:30

(65강) 염려의 문제

조회 수 449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12:22-31http://onlycross.net/videos/nuk/nuk-12223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설교>

 

◉ 누가 주인인가? ◉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은 곧 자기 몸을 위해 산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리켜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사는 어떤 존재도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의 경우도 비록 상식적으로 본다면 정당한 부탁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탐심으로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자기 몸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형으로부터 유산을 나눠 갖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심이고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부자의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소유만 넉넉하면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유의 넉넉함에 마음을 두지만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영혼을 부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은 ‘내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내 영혼을 부르시는 것은 물론이고 내 몸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신 몸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과연 현재 주어진 자신의 몸에 대해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데 이러한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 몸을 향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염려는 자기 몸을 향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숙명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염려의 문제가 우리 마음가짐에 따라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 말씀대로 ‘염려하지 맙시다’라고 독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는 우리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실제로 염려하지 않는 신자가 되기를 요구하시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고 하시고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아야 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염려와 근심은 본능적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지 염려한다고 일이 달라지나’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스려보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염려와 근심에 매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염려의 문제를 새와 백합화를 내세워 말씀합니다. 새도 백합화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새도 백합화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자신이 자기를 위해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소유를 친히 관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음식보다 목숨, 의복보다 몸 ◉

 

그런데 우리는 새와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28절에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귀한 존재를 귀하게 여기심으로 베푸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23절에 보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하시는 일은 음식이나 의복에 관한 일이 아니라 목숨과 몸에 관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먹고 입는 문제를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목숨과 몸의 일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문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산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사람이나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바라보며 인생을 즐길 계획을 세운 부자는 먹고 입는 것에서 인생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는가에 인생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어떤 목숨, 어떤 몸이 참된 가치가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든 그 목숨과 몸은 멸망으로 들어갈 죄의 몸이고 목숨일 뿐입니다. 이러한 목숨과 몸을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목숨과 몸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귀히 여기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먹고 입는 것으로 우리의 목숨과 몸이 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은 인간의 목숨과 몸의 가치를 먹고 입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소유하고 있고 외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러한 목숨과 몸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용서 아래 있는 목숨과 몸을 귀히 여기고 받아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는 목숨과 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야 말로 놀라운 사랑이며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꿈에서라도 누려보고 싶어 하는 것이 솔로몬의 영광입니다. 원 없이 돈을 써보고 싶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솔로몬의 영광도 백합화 꽃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것이 천국의 가치 기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유, 돈으로 가는 길이지 진리나 생명으로 가는 길이 아닐 것입니다. 진리나 생명은 천국이라는 결과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 과정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과정은 소유의 넉넉함으로, 그 결과는 진리로 인한 생명으로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내용인 이상 우리는 일상생활의 세상적 틀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그 문제를 우리도 동일하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부르며 나의 염려와 근심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일들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일에 비해 종교적인 일이 더 거룩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먹고 마시는 문제가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는 능력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길에 있는 자신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둔 신자인 것입니다.

 

◉ 그의 나라를 구하라 ◉

 

30,31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일상생활로 인한 염려와 근심은 접어두고 하나님 나라만을 구하면 일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해결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구하고 관심 두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천국 가는 것에 목적을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입는 일상의 문제가 염려와 근심으로 다가오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주의 세계, 진리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그 세계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에게 천국 가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 나라를 알고 싶은 마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능력이 되는 세계에도 관심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천국만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해 다스림 받는 신자의 삶이 궁금해지고 알고자 한다면 입고 먹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향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이 궁금합니까? 부자처럼 창고에 가득한 소유로 즐기는 인생이 궁금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궁금증입니다. 적어도 생명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믿음의 역사를 믿는 신자라면 생명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의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먹고 입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풍족하게 먹고 마시고 좋은 것을 입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영광은 꽃 하나만큼도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의 안목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심으로 훌륭한 영광으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먹고 입는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먹고 입는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향할 것입니다.

 

 

꽃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얼마나 예쁜 꽃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몸의 영광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아주는 것으로 몸을 치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유욕이 우리를 염려와 근심으로 끌어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먹고 입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입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신자 된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서 추구해야 할 문제는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은 적어도 먹고 입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두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신자가 무엇에 뜻을 두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5.06.20 351 에베소서 (66강) 선한 말 신윤식 3201
2018.08.18 350 고린도전서 (66강) 본보기 2 file 신윤식 1580
2013.06.30 349 누가복음 (66강) 나의 보물은 신윤식 4463
2013.06.23 » 누가복음 (65강) 염려의 문제 신윤식 4496
2015.06.13 347 에베소서 (65강) 도둑질 하지 말고 신윤식 3320
2018.08.11 346 고린도전서 (65강) 다 같은 신윤식 1368
2013.06.09 345 누가복음 (64강) 생명과 소유 신윤식 4716
2015.06.06 344 에베소서 (64강) 분을 품지 말고 신윤식 4557
2018.08.07 343 고린도전서 (64강) 달음질 하라 file 신윤식 1894
2015.05.30 342 에베소서 (63강) 참된 것을 말하라 신윤식 3386
2013.06.02 341 누가복음 (63강) 시인과 부인 신윤식 4417
2018.07.28 340 고린도전서 (63강) 모든 사람 file 신윤식 1300
2013.05.26 339 누가복음 (62강) 외식을 주의하라 신윤식 4534
2015.05.23 338 에베소서 (62강) 새 사람을 입으라 신윤식 3408
2018.07.21 337 고린도전서 (62강) 복음을 위하여 신윤식 1508
2013.05.19 336 누가복음 (61강) 저주 선언 신윤식 4321
2015.05.16 335 에베소서 (61강) 옛 사람 새 사람 신윤식 3478
2018.07.14 334 고린도전서 (61강) 바울의 상 신윤식 1461
2018.07.07 333 고린도전서 (60강) 바울의 자랑 신윤식 1577
2013.05.12 332 누가복음 (60강) 겉과 속 신윤식 4951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