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0.27 10:08

(141강) 바벨론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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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7: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137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설교>

 

에스겔 48:35절에 보면 ‘여호와 삼마’(거기 계시는 하나님)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 이레(준비하신 하나님), 여호와 닛시(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 샬롬(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등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에게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이 계시된 것은 그들이 있는 곳에 여호와가 계시고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승리와 평화와 소망과 기쁨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유다가 무너지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삼마가 진심으로 소망과 위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호와가 자신들이 있는 곳, 즉 바벨론에서 고통을 겪는 그곳에 계신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시 137편도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말합니다. 포로 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보면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함께 하지 않으신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137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수금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악기입니다. 그것을 버드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노래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고 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잔치를 베풀어 즐기면서 유다 포로를 데려다가 자신들의 흥을 위해 노래를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하고 포로가 된 유다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면 또 다른 고초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붙들려 온 처지에서 바벨론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분명 그에 따른 보복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잔치 자리에 포로를 데려올 정도라면 바벨론에서 귀족이나 높은 위치의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노래를 거부하기보다는 그들 요구대로 노래를 불러서 그들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앞으로의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버림으로 노래 부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을 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절)라며 노래 부르는 것을 거부한 이들의 심정을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5,6)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방인의 즐거움을 위해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안위를 위해 이방인에게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바에야 차라리 오른손으로 수금을 탈 수 없게 되는 것이 낫고, 노래를 부를 수 없도록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저자는 자신의 기억에서 예루살렘이 잊혀지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자신들이 거주했던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온에서 베풀어지는 여호와의 은총을 기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온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거룩한 곳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까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성전의 기구는 약탈당했고 많은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고 신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뜻을 둘 때만 가능한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저자에게서 이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주어진 환경과 처지만을 보며 자기에게 유리한 길을 가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시편 저자도 얼마든지 주어진 처지에서 바벨론 사람의 기쁨을 위해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이 육신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바벨론 보다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잊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수준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고개를 숙이는 갈대처럼 주어진 현실에 맞게 오직 육신의 유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과연 저자가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기억하는 신자로 산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자는 7절에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해 달라 하고 에돔 자손을 치시기를 구합니다. 에돔은 바벨론 족속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도 바벨론을 저주하고 9절에서는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친다는 것은 사 13:1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짓밟는 것처럼 바벨론을 철저히 짓밟고 무너뜨리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소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처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된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되어 두려움 없이 노래 부르는 것을 거절 한 것입니다. 육신이 처한 현실은 바벨론에서의 고통이지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현실은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임을 바라본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이 기억되어 있는 신자에게 현실은 하나님이 이루실 말씀의 세계이지 육신이 처한 현실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게 되면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심과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심중에 기억되고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만 신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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