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1.10 10:21

(143강) 나를 아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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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9:1-10http://onlycross.net/videos/psa/psa-139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설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용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것은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의미의 전지전능,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무소부재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1-4절은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6-10절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던 나의 행동과 생각까지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도 감출 수가 없음을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감춰질 수 있는 죄는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의 본질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시고 죄로 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이 나올 수 없는 인간으로 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세밀히 살피시면서 죄를 범하는지 범하지 않는지 감시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아시고 나의 행동을 살피신다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시는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는 어떤 관점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는 것에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자는 6절에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면 우리에게 진심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도 아실 것이고,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셔야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인가도 아실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저자는 하나님의 지식을 기이하고 높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이 이처럼 기이하고 높기 신자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스올,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손으로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신다고 합니다.

 

 

결국 신자는 어디에 있든 늘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디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인도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강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신뢰로 평강을 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죽을 정도의 매를 맞으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를 바라보며 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고, 옥에서도 찬송했음을 생각하면 믿음은 분명 우리를 사도와 같은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도의 기쁨과 평강에 참예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귀찮게 느껴지십니까? 만약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이 없이 우리 뜻대로 산다면 필연코 우리는 생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뜻은 항상 생명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라고 말하며 자기 존재 자체를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고백합니다. 저자는 단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모태에 잉태하게 하고 세상에 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나의 존재만을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저자는 자신을 지으시고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것을 하나님의 기묘한 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성도로부터 나오는 고백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음 받은 이유를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자신의 존재에만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6,17절)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태에 잉태되어 존재하고 세상에 사는 날까지의 모든 일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일을 겪을지를 이미 정해놓으셨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모든 삶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주장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주의 생각이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되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안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안과 염려에 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보다 생존에 더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보배로운 생각으로 우리에게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것일까요? 저자는 그것을 19-24절의 내용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9-22절을 보면 저자는 갑자기 악인, 원수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을 악인을 반드시 죽이시는 것과 연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시작되고 마쳐질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고 높은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심으로써 악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나나타내고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절)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영원한 길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길은 우리의 뜻이나 의로는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영원한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길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길로 인도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는 분이라면 우리를 악에서 구출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인해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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