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2.03 10:38

(145강) 죄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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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1:1-10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1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4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6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7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8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9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0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설교>

 

사  45:15절에 보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숨어 계시다는 것은 침묵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일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된 관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병 고침이나 문제 해결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 하심과 사랑하심을 인식하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어 하지만 그 어떤 기적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적을 체험할수록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시는 생각으로 굳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나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유다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신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무너뜨리시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이며 그 뜻은 유다를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멸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 안에서 유다가 무너질 때,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통을 겪을 때에도 마치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조용히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곧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것을 숨어 계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무너짐과 고통이 외적으로 보면 큰 불행의 사건이지만 오히려 유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통로로 그들 앞에 펼친 은총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막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현실에 붙들려서 현재의 형편에 따라 그 마음 또한 흔들리고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 현재의 형편이 좋으면 좋은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아쉬운 것이 없고 자기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41편의 시편 기자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9절에서 올무와 함정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해하려는 악한 자들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는 힘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1절)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른다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장소에 계시다가 신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오시는 분도 아닙니다. 늘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나‘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의 내용은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신에게 속히 오셔서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이 처한 힘든 형편에서 구해달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기를 원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처한 힘든 현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부르짖는다는 것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기도를 듣게 하시고 응답을 받기 위한 자기 열정의 표현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의 믿음에 있고자 하는 간절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자기 열정을 드러내기 위해 소리쳐 고함치듯 외치는 것을 ‘부르짖음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의 종교성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을 열정적인 기도로 여기며, 그러한 기도에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2절의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분향과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기도가 분향과 제사같이 되기를 구합니다. 즉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기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아들들이 되게 하신 뜻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이 처한 힘든 형편이 나아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기도와의 차별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3절의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는 내용에서 잘 나타납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 입술을 지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질 수 있고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유혹은 항상 진수성찬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의 유혹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나무를 바라봤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고 결국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죄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도록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는 의인이 자신을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고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자신의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겪는 고난으로 인해서 의인이 자신을 충고하고 책망할지라도 그 모든 말을 은혜로 여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그 원인이 나의 잘못 때문이라며 충고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 말을 은혜로 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는 것은 자신을 책망했던 사람들이 재난을 겪게 되면 우리의 본성은 보복심이 앞서게 됩니다. 나를 책망한 것을 기억하며 나 또한 그들을 책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러한 본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재난 중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신자의 기도입니다.

 

 

6,7절을 죄의 결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죄의 결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신자는 보이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기보다 죄를 따라 행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죄의 유혹에는 한없이 약한 것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8절에서 주께 피한다고 하고, 9절에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에 처한 자신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둔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응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숨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죄의 유혹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며 함께 하시고 응답하고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자는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고난과 어려움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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