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2.15 10:12

(147강) 주를 사모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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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3:1-12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3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3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9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2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설교>

기도하는 사람이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감출 수 없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주의 진실과 의로 응답해 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이러한 응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기도한 내용대로 실현되는 것을 하나님의 응답의 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것 말고 원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자는 차원이 다른 응답에 대해 말합니다.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구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진실과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진실과 의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진실과 의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불의와 죄 밖에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그러한 자기의 실상을 알기에 주의 진실과 의로 응답해 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과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 것이고,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불의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죄와 불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내세울 의와 진실은 없지만 하나님의 진실과 의를 의지해서 응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의 진실과 의를 믿고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려 죽어가면서 주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구하는 강도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죄 없이 죽으시는 주님의 의로우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자가 주의 성실과 의를 응답해 달라고 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2절을 보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행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은 3절에서 말한 것처럼 저자가 원수로 인해 핍박을 받는 형편에 처한 것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라보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자신이 처한 형편을 불의를 행한 자에 대한 당연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신자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하나님 앞에 서서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불의와 죄를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의는 겨자씨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를 심판하시겠다 하신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진다고 해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진실과 의를 의지해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신을 근거로 한다면 심판이 마땅하지만 주의 진실과 의를 근거로 한다면 심판에서 건짐 받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저자의 고백대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의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게는 심판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진실과 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정직한 고백입니다.

 

 

이러한 정직함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6절)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유일한 희망, 즉 심판에서 건짐 받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주의 진실하심과 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가 주를 사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의함을 안다면, 그래서 원수가 자신을 핍박하고 마치 자신을 죽은 지 오랜 자처럼 암흑 속에 가두어 준 모든 형편들도 불의를 행한 자신에게 당연한 것을 깨닫는다면 4절의 고백처럼 그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그 마음 또한 참담할 것입니다. 힘든 형편으로 인한 참담함이 아니라 불의함 밖에 나올 것이 없는 자신으로 인한 상함과 참담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 신자는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떤 자기 열심이나 정성이나 행위를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진실과 의로움만이 자신을 심판에서 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절)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원수로 인한 어려움에 처한 자의 기도라고 힘들 정도로 평안함이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가장 먼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본성조차 초월하게 한 것이 바로 주의 진실과 의를 의지하고 주를 사모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저자는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환난에서 자신이 다닐 길을 알게 하는 것이 곧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주의 뜻을 행하는 길로 가기를 원한 것입니다(10절). 저자는 이것이 자신의 영혼이 환난에서 건짐 받는 길임을 안 것입니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심판을 행하지 말고 살려달라는 것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의로 자기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 내달라고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주를 사모하는 자의 기도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불의함을 알고 주를 사모하게 되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불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위해 주를 찾고 기도할 리가 만무합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주를 찾고 기도하고 응답을 구한다면 그는 주의 눈 앞에서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의 진실과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내세우게 되는 것이고 주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주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응답을 필요로 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 원하고 매일의 삶에서 자신이 다닐 길을 알게 되기를 원하는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매일의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욕망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사모하는 자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를 사모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근거를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길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진실하심과 의라는 것을 알기에 온전히 주를 사모하는 자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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