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2.29 10:13

(149강) 위대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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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5: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5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6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7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설교>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에 듣고 소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면 결국 그가 기존의 왕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그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선지자의 기록을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헤롯왕을 밀어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가 왕이다’는 그 어떤 증거도 흔적도 보여주지 못하고 초라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처럼 왕으로 나셨으면서도 왕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왕이 되신 나라는 이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주의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에 속하여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곧 참된 유대인으로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는 왕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왕정 시대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한 나라를 대표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지도자가 존재합니다. 세상은 왕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백성을 잘 살피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고 되어 있고 이 시를 기록할 당시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런 그가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면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일컫는 것은 자신의 왕 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헤롯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받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죽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처럼 왕이면서도 자신의 왕 됨을 내려놓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자신이 통치하는 자신의 나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45편을 보면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할 분으로 높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시고 은혜와 긍휼과 인자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왕도 자기 백성을 하나님처럼 다스릴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리 위대한 왕이고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위대하신 나의 왕이라는 고백에 우리도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일컫는 것은 교회 안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시편 저자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를 알고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말한 대로 저자인 다윗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왕 됨을 내려놓습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왕의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나의 뜻대로 이루기 위해 분주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왕이라고 하고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의미 없는 종교적인 고백으로 겉돌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고 말합니다. 주의 나라는 주께서 통치하시는 세계를 말합니다. 저자는 이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이 주가 되어 통치하고 계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의 통치가 자신에게 생명으로 다가옴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이 곧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은 그 나라에 속한 백성 또한 영원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항상 보이는 세상만 바라보면서 왕이신 하나님이 이 땅의 좋은 것으로 채워주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상이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은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평안과 복을 누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생이‘사는 날 동안’으로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사는 날이 끝나면 하나님 앞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때에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영광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은혜와 인자와 긍휼로 다스리며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 존재하는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왕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힘이며 그 힘을 가진 자는 왕 노릇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돈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돈보다는 진리가 더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우리 마음은 늘 돈으로 기울어집니다. 돈은 현실인 반면에 진리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현실이며 현재입니다.

 

 

사도는 옥에 갇혔으면서도 기뻐하고 찬송했습니다. 이것이 진리가 힘이 되어 나타나는 현실이며 현재입니다. 즉 돈으로 사는 현재가 있는 반면에 진리로 사는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는 현재는 몸은 편할 수 있으나 그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진리로 사는 현재는 영혼을 자유롭게 합니다. 몸이 고달프고 편함과 상관없이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영원을 소망하게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추구할 현재는 바로 이것, 자유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다’라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나의 소원을 이루신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모든 뜻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소원은 자신의 뜻과 연결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연결된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있기에 그 소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왕이시고 위대하시며 은혜와 인자와 자비와 긍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그 이름을 영원히 송축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소원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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