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4.01.05 09:59

(150강) 여호와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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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6:1-10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6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설교>

 

우리는 할렐루야라는 단어에 아주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 아주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할렐루야는 구약성경에서는 시편에서만 언급되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만 몇 번 언급될 정도로 극히 드물게 사용됩니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할렐루야를 너무 빈번하게, 또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146편은 그 내용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이 같은 구조는 마지막 시편인 150편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물론 지금까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는 시편을 많이 살펴봤지만 시편의 마지막 부분 다섯 편이 모두 ‘할렐루야’를 주제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편의 핵심 주제를 ‘할렐루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은 신자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대 교회가 행하는 찬양 집회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찬양 집회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을 감정에 취하게 하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하게 하는 독소와 같은 요소를 담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찬양의 대상인 여호와가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인지에 대해서는 도외시 하고 다만 악기가 동원된 요란한 음악만을 즐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점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시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찬양에서 이 내용은 빠지지 않고 언급됩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누구신가에 대해 모른 자가 찬양을 한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노래에 불과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말을 할까요? 먼저 6절에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라고 말합니다.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신다는 것은 영원토록 진실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진실하심으로 행하신 일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불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비록 공평하지 못하고 부당한 일로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불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10절에서도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시면서 ‘어떻게 통치해줄까’라고 피조물의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통치하십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그 계획대로 이루어주시기를 바라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에 대해 의문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에도 순종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설사 내 자신이 실패와 죽음에 처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부당함이나 불공평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찬송은 우리가 처한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도가 옥에 갇힌 형편에서도 찬송했던 것처럼 모든 형편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고 여호와의 일하심에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는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형편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할렐루야’는 거짓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현재의 형편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질 것인데 그런 사람에게 할렐루야는 다만 형식에 머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1절에서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사실 영혼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몸은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라 함은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자신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육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향해 반응하고 나아가는 새롭게 된 인간을 표현하는 말이 영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 반응하고 갈급함이 있는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되지 않습니다. 육신은 얼마든지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만족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은 여호와의 일하심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족함을 얻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향한 영혼은 이미 세상의 것이 자신을 만족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만족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만족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자기 육신에 머물게 되고 신앙의 만족 역시 육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교인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을 만족하게 해주는 것을 좇게 되는 것이고 영이 아닌 육적인 존재로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앞설 뿐입니다.

 

 

7-9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우리의 영혼에 만족이 되는 생명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신자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눅 4:18-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시편의 저자가 말한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함인 것이고 신자는 예수님의 오심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되며 그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족함이 됨으로서 나타나는 찬양인 것입니다. 이것이 ‘할렐루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46)라고 말하면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7-48)고 찬양합니다. 또한 53절에서는 주리를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자신에게 잉태된 예수님에게서 바라본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억눌린 자이고 주린 자이며 갇힌 자고 맹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 억눌리고 갇히고 무엇에도 족함을 모르는 주린 자로 살아가고 생명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심으로 죄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족함이 되심을 알게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는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길은 이미 굽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풍족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 길은 이미 생명으로 향하지 않은 굽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는 악인의 잠시 동안의 형통을 형통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절)라고 말합니다.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호흡이 끊어지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5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도움을 삼을 뿐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길로 가도록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세상 누구로부터도 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늘 생명으로 그 마음이 향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과 함께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인생이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 그대로 세상을 전부로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억눌리고 주리고 맹인인 나의 형편도 알지 못한 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눈이 열리며 생명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고 그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이 기쁨이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사하게 하고 ‘할렐루야’라고 찬양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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