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4.01.12 10:26

(151강) 기뻐하시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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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7:1-11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7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8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설교>

 

시편의 마지막 부분 다섯 편이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것을 보면 시편의 결론이 할렐루야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편의 중심 주제를 ‘할렐루야’로 정해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할 때 여호와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반드시 언급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본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신자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힘든 고통을 겪는 형편일 때입니다. 그럴 때도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마땅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게 될까요?

 

 

사실 우리의 신앙은 외적 조건, 즉 주어진 형편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자기 육신의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물론 육신의 문제 또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처럼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기 위해 때에 따라 육신의 문제를 도구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세우신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무너졌음을 전제하는 말이고, 흩어진 자들을 모으신다는 것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흩어짐을 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여호와의 징벌로 인해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하셨고, 유다 또한 바벨론을 보내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신다고 합니다. 3절에서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상심한 마음이 고침 받고 상처가 싸매질 수 있을까요?

 

 

 

바벨론의 공격으로 인해 가족들을 잃고 포로가 되어 오랜 세월동안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서 상처 입고 상심한 마음들이 고침 받고 싸매질 수 있는 것일까요?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지고 다윗 때에 누렸던 영광을 되찾아 부요하게 된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옛날의 상처는 덮어질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상처를 싸매고 고치실까요?

 

 

무엇보다 예루살렘을 무너지게 하신 하나님이 왜 다시 세우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단지 백성이 고통을 겪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신 것이 이유라면 하나님은 얄팍한 인간의 동정심으로 일하시는 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삼하 22:51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다윗과 그 후손에게 영원하도록 베푸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기름 부음 받으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는데 이 약속에 의해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백성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인자하심을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근거로 다시 모으시고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처음부터 인자를 베풀어서 그들의 죄를 덮어주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죄를 덮어 주셨다면 유다가 무너지지 않고 편안한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의 무너짐이 없이 무조건 죄를 묵과하셨다면 유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 수 없고 인자를 찬양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게 하시고 포로 되게 하시는 고통의 길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고통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백성이라면 실망하기보다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러한 신앙인으로 등장합니다. 유다가 무너진 상황만 본다면 ‘과연 하나님이 계실까?“라는 의문이 앞설 수밖에 없지만 풀무불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모으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은 상처를 싸매고 고치심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4절에서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백성은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돌아오게 하셔서 예루살렘을 채우실 것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별들의 수효를 세신다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수효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으실 때 수를 세어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그 수효가 맞는지를 위해 세시는 것이고 작정하신 그 이름대로 모두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진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면 불 못이 아닌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될까요? 신앙생활 잘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고 이름을 기록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적인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이름을 기록하십니다. 그래야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고 이름을 기록하셨다면 ‘나는 천국에 갈만한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랑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의 방식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다만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한 더러운 나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것도 그들이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인으로 변화되었기에 다시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인자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게 된 백성이라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일하시는 의도를 알게 됨으로써 상처와 아픔이 싸매지고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시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고 좀 더 나은 자를 골라서 천국가게 하신다면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능력이 많고 지혜가 무궁하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잘함을 보시고 그에 따라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은 단지 천국 심사위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무너짐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를 깨닫게 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유다의 무너짐만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마음의 낮아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를 다시 모으시고 세우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과 은혜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다만 크신 은혜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낮아진 마음이며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가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고 높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해 주시고 동행하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를 예수님 안에 있게 할 만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세계를 더럽히는 일밖에 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다면 병들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병들게 하시고 무너지게 하신 것 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마음 두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낮아진 겸손한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다스림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8,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비를 준비하시고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고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 눈에는 단지 하나의 자연으로만 보이는 일들이 시편 저자는 그 모두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바라봅니다.

 

 

사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만 생각해도 구름을 모으시고 비를 준비하셔서 내리게 하신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들에 풀 하나가 자라는 것 까지도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시각이 열림으로 풍성한 신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는 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10-11절).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14,15절에서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 평안하게 되고 주리던 그들이 배부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뿌려지다가 바람을 불게 하셔서 그것들을 녹이시는 것도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신 결과입니다(16-18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자연을 다스리신 하나님이 야곱에게도 말씀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외에는 어느 민족에게도 말씀을 보이지 않았습니다(19,20절). 그렇다면 야곱이 누리는 복은 하나님이 말씀을 보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이신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의 차이는 죄를 아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보이심으로 죄를 알게 되고, 죄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일하심에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말씀에 의해 주관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에게 말씀을 보이셨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죄를 깨닫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된 것이 넘치는 복입니다. 신자는 이 은혜 안에 있기에 어떤 삶에서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세워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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