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4.01.26 10:33

(153강) 찬양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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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9: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149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설교>

 

149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면서 찬양의 이유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셨고, 그들의 왕이시라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신의 존재에 집중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하면서 신자는 소유 지향적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을 위해 중요합니다. 어떤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찬양 이 아닌 불만이 가득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둡니다. 소유를 하나님의 복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소유가 증가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은혜를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감사와 찬양은 소유 증가가 조건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 지향적인 사람은 소유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존재의 시간 전부를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자는 자신을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자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지으시고 부르시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은 식상하거나 뻔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인 것이고 소유에 집중하고 살아가느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부족함이 베푸신 은혜를 보지 못하고 감사와 찬양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잘못됨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찬양은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감사가 앞서 말한 것처럼 소유의 증가, 확대로 인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소유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지금의 소유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시시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소유 증가와 확대를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로 인한 감사와 찬양은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신앙 세계의 찬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유로 인해 감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소유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받은 자가 신자라면 신자는 그것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소유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신자의 삶에서 찬양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소유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소유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고 삶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유를 초월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만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삶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눈이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은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소망하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기에 여러 가지의 복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복과 하늘의 복을 동일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의 가치를 알게 된 신자라면 그만큼 보이는 세상의 것이 무가치 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그 뜻이 내게 이뤄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사람에게서 찬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조금 색다른 말을 합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찬양과 함께 칼에 대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과 칼은 뭔가 조화롭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칼의 용도는 7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뭇 나라에 보수하고 민족들을 벌하여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칼이 무엇 때문에 찬양과 함께 언급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신자는 이방인, 즉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심판할 권세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었던 종교 전쟁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느 절의 불상이 훼손된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을 붙잡고 보니 기독교인이었으며 우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의 전쟁을 말하지 않습니다.

 

 

칼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심판은 세상을 무너뜨리는 것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의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멸망이지만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스리시고 붙드시며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은혜의 완성의 날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의한 것임이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영광이 완성될 심판의 그 날을 바라보며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는 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찬양은 1절에서 말한 대로 새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 14:3절에 보면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말합니다.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았고 그리스도로 인해 속량함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들이 부를 새 노래는 자기 죄를 속량하신 주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순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새 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존재지향적인 신자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외적으로는 새롭다고 할 것이 없고 신앙이 없는 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단지 존재한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소유를 통해서 차별적인 몸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세상이 부를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를 자로 부름 받았고 그 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 있는 자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칼로써 뭇 나라에 보수하고 민족들을 벌하는 심판의 때를 생각한다면 복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도 심판의 때에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심판은 왕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왕의 권세로 심판을 행하실 때 새롭게 지음 받은 신자는 왕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어지는 신자의 영원한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은 신자에게 힘이고 위로이며 든든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의 참된 현실은 왕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지금의 현재만을 보면서 울고 웃고 할 사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이 있고 그들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셔서 모든 죄를 속량하셨으며 그러한 자기 백성으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신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항상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감사와 찬양이 됩니다. 도무지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자를 기뻐하시는 그 은혜가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9절에 끝에 보면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든 분명한 것은 새 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백성이고 영원한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평생토록 감사와 찬송의 근거와 힘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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