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4.02.02 10:40

(154강)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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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50:1-6http://onlycross.net/videos/psa/psa-15001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설교>

 

시편은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있음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신 이유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사 43:21절에서도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신자의 본분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150편은 매 구절 찬양하라는 말이 두 번씩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편이 찬양을 강조하면서 끝맺는 것은 신자의 삶에 찬양이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찬양은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라고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증거 한다는 것은 언어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의 삶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찬양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성소에서 찬양하라는 것은 예배 처소에서의 찬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성소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흘러나와 백성들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성소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을 찬양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찬양의 내용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자 하는 찬양의 내용이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소에서 행해지는 용서이며,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같은 찬양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기쁨의 일은 소위 세상에서의 좋은 일을 말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좋은 일이 있기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도 찬양이 가능할까요? 힘든 상황이니까 찬양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는 우리 삶의 어느 한 순간도, 한 부분도 찬양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삶은 형편의 여부와 상관없이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궁창은 하늘을 말합니다. 하늘에서 행해지는 권능의 일 또한 찬양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행해지는 권능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 것이 성소입니다. 세상의 권능으로 불가능한 것은 용서입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속한 자를 생명에 속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늘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권능이 성소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아실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소는 더 이상 어느 한 공간에 고정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시어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성소라는 공간이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온전히 증거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너무 익숙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새로운 은총으로 다가오기보다 식상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삶의 충만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고 결국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찬양을 기대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2절에서도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찬양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위대하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은 1절에서 말씀드린 성소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찬양의 내용과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형식과 의식으로 행하는 신앙생활에는 얼마든지 익숙해 질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포함한 교회에서의 일을 오랫동안 반복하며 행해왔는데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형식과 의식의 식상함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과 의식을 만들어 도입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일정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움은 형식과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세계 자체가 새로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새로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에 마음이 열려야 하고 위대하신 권능으로 다가와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심각한 본질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어둠의 세계에서 건지시고 빛의 세계에 속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찬양은 말 그대로 형식에 머물 뿐입니다.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은 신비이며 권능의 세계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말하고 노래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아닌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의 것으로 찬양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할렐루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보이는 어느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의 세계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은 부족함이 없는 푸른 초장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이고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잊고 있기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넓게 생각하면 숨을 쉬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숨을 쉬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찬양은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위대하심을 아는 신자에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찬양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노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호흡이 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호흡하면서도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생명이 있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존재하는 사람이야 말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호흡이 있는 그 순간까지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신자는 찬양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주 안에서는 소유의 많고 적음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소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높고 낮음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높고 낮음 역시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의 은혜로만 충만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로 드러날 뿐이며 반면에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능하신 분으로 증거됩니다. 그래서 ‘나 용서 받았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용서하신 권능과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상투적인 할렐루야가 아니라 실제적인 할렐루야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웃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도 우리를 주관하시고 권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 전부가 아니라 그 내면에 자리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행하심으로 인해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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