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0.06 09:48

(137강) 연합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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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3:1-3http://onlycross.net/videos/psa/psa-133010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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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설교>


 

본문은 형제가 서로 화목한 가정의 아름다움과 성도가 서로 연합하여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교회를 노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가정이 화목하고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말씀을 곡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형제가 연합하여 서로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내용을 문구대로 이해하여 형제가 한 집에서 함께 동거하는 가정의 화목과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요즘처럼 핵가족화 된 세태와는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연합 역시 교인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고 단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각기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연합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미 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 증거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책임은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 된 인간의 본성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심으로 인한 가인의 시기심은 아벨은 더 이상 가족으로, 형제로 여기지 않게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가족, 형제, 혈육이라는 관계에 있다고 해도 자신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비록 성도라는 이름으로 모이기는 하지만 혈육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의 연합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생계를 위해서는 같은 교회의 교인이라고 해도 경쟁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경쟁에서 밀리면 어김없이 분노와 시기심이 일어나게 될 것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형제로 여기며 연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망과 포부와 기대와 꿈을 모두 내려놓는다면 가능하다 하겠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간됨을 염두에 두고 시편 저자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노래를 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저자는 1절에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합니다. 세상에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흔히 미담이라고 하는 것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포함될 것입니다.

 

 

가령 전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한 일이라든지, ‘철가방 우수씨’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고아 출신으로 72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은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 살고 5명의 저소득 어린이를 7년 동안 돕던 중국집 배달원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누구에게나 선하고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기에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삶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저로서는 감히 행할 수 없는 삶을 산 그분을 포함한 많은 분들을 누가 폄하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 눈에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삶들이 정작 하나님께는 선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악한 본성으로 살아가는 인간관계에서는 연합과 동거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연합과 동거이기에 만약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한다면 그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연합과 동거로 인한 선하고 아름다움을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아론의 수염에 기름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을 때 그 머리에 기름 붓는 일을 상기하게 합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는 장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제사장 직분과 연결하여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제사장은 단지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누리게 하는 역할이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 누구도 온전히 그 역할을 행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제사장은 예수님 한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자신을 버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벧전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성도가 예수님이 행하신 제사장의 직분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며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 즉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거나 정죄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형제를 심판하고 정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화목하게 하신 복에 신자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제 관계입니다. 형제의 연합과 동거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관계가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관계인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것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합니다.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음으로 화목한 관계를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연합과 동거로 선포되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덕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가 예수님을 알고 그런 노래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 받는 것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내다봤고 그 역할에 담긴 선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는 구절도 선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헐몬 산은 아주 높은 산으로 꼭대기에 있는 눈이 증발하여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유다에 이슬로 맺힌다고 합니다. 유다 땅에서 이슬은 곡식이 자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유다에게 헐몬 산은 특별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유다 사람 누구나 헐몬 산을 특별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하나님을 특별하신 분으로 바라보며 우리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게 하신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한 분으로 바라보고 그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는 그 관계를 형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모이는 신자는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나로 인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입니다.

 

 

이러한 형제 관계로 모인다면 누군가가 어떤 아픔과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만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연합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이 이런 연합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연합의 관계에는 영생의 복이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영생의 복을 바라보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이 복을 노래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선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선하심과 자비가 증거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덕이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제사장으로써 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께만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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