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10.13 09:35

(138강) 여호와를 송축하라

조회 수 353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시 134:1-3http://onlycross.net/videos/psa/psa-134010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설교>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될 수밖에 없는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는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그가 메시아라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증거는 메시아의 나라가 실제로 세상에 건립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메시라고 하는 예수님이 그들의 세계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나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전히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예수님에게서는 로마를 축출할 영웅적인 힘과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 시각에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규정하신 여러 가지의 의식이나 절기를 통해서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내셨습니다. 가령 제사법을 통해서는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희생당한 제물로 오신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유월절을 포함한 모든 절기나 십일조 희년 모든 규례들이 메시아를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제사를 행하고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키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으로 그 눈이 가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하나님을 송축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형식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송축은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행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송축을 말하고 있습니다.

 

 

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마지막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이 성전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가능했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에 나와 제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남다른 감회가 있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성전에 오르면서 하나님이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흔히 자기감정에 붙들려서 자신을 발산하는 방식으로 찬송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본문이 말하는 송축은 그런 노래와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1절을 보면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멀리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제사하고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나름대로 짐작은 해 볼 수 있습니다.

 

 

멀리에서부터 여호와의 성전을 찾은 사람이라면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은 경건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눈에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췰까요? 크나큰 여호와의 복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에도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 수고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귀한 은총 안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며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성전에 거하는 것 자체를 복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다시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소를 향하여 송축하라는 것은 송축의 근거와 이유가 성소의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소는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메시아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것이 성소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관심을 두고 나오게 되면 송축은 육신의 일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로 인한 하나님의 구속의 일보다 자기 육신의 일을 더 크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이 아니라 송축을 명분으로 자기 잘됨을 높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성소라는 뜻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성소의 참된 의미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인자, 자비, 도우심과 지키심 등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육신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예수님이 아닌 육신의 일을 근거로 제멋대로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신앙이 아닌 종교로 흐르게 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의 문제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내가 얻고자 하는 것과는 다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육신의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복은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는 복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가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어 놓으시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우리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았던 고통과 어려움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깨닫게 된다면 신자는 주어진 조건을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의 복에 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송축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소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것은 성소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친히 일하심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일하고 인간이 만들어서 하나님에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인간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소에는 오직 희생 제물의 피가 흐를 뿐이고 그 피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송축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해 증거된 인자와 자비하심만이 송축의 이유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소는 주의 백성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러한 성소의 기능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일까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모든 죄가 용서됨을 믿는 신자가 성소이며 그 심령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일을 이루신 여호와를 송축합시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 시편 시편1-76편 강해 신윤식 2018.08.13 7257
74 시편 (154강) 할렐루야 신윤식 2014.02.02 3568
73 시편 (153강) 찬양과 칼 신윤식 2014.01.26 3272
72 시편 (152강) 찬양 받으실 이 신윤식 2014.01.19 3276
71 시편 (151강) 기뻐하시는 자 신윤식 2014.01.12 3065
70 시편 (150강) 여호와를 찬양하라 신윤식 2014.01.05 3232
69 시편 (149강) 위대하신 주 신윤식 2013.12.29 4054
68 시편 (148강) 복이 있는 자 신윤식 2013.12.22 3285
67 시편 (147강) 주를 사모하는 자 신윤식 2013.12.15 3417
66 시편 (146강) 피난처 신윤식 2013.12.08 3162
65 시편 (145강) 죄와 기도 신윤식 2013.12.03 3113
64 시편 (144강) 구원의 능력 신윤식 2013.11.24 3743
63 시편 (143강) 나를 아시나이다 신윤식 2013.11.10 3415
62 시편 (142강) 나를 위한 보상 신윤식 2013.11.03 3204
61 시편 (141강) 바벨론에 앉아서 신윤식 2013.10.27 3487
60 시편 (140강) 감사의 노래 신윤식 2013.10.20 3336
59 시편 (139강) 특별한 소유 신윤식 2013.10.13 3304
» 시편 (138강) 여호와를 송축하라 신윤식 2013.10.13 3537
57 시편 (137강) 연합의 의미 신윤식 2013.10.06 3572
56 시편 (136강) 여호와의 처소 신윤식 2013.09.29 363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