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2.12.23 10:21

(99강) 완악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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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5:1-11http://onlycross.net/videos/psa/psa-95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설교>

 

우리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자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나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고 반문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믿음 안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불안과 염려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불안과 염려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창조 신앙에 온전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은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온 우주 만물이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범위에는 우리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전히 주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신앙 안에서 생존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뜻이 있어 우리를 지으시고 뜻이 있어 우리를 부르셨다면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 인생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염려는 창조 신앙에 온전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라보기에 주변 환경들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풍요 속에서의 염려와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고 사는 급박한 생존의 문제로 인해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풍요 속에서 그 풍요로움을 잃을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고, 더 많은 풍요를 누리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잃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1-6절까지 보면 시편 저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합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며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자고 합니다. 이 저자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부요를 누리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자신을 부요하게 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고 노래하자고 하는 것일까요?

 

 

시편 저자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삶은 그렇게 풍요롭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농사와 목축에 모든 것을 의존했습니다. 농사를 망치면 일 년을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지금보다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노래하고 감사하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삶은 환경과 무관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나타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지금보다 더 여유로워지고 넉넉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간을 알지 못하는 무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풍요로운 삶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풍요롭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것이 빈곤이든 풍요든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신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빈곤에서의 감사든 풍요에서의 감사든 감사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해도 환경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살린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환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백성이고 돌보시는 양이라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며 삶의 조건이고 평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것으로, 좋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멀리 계신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편 저자는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음의 완악이 어떤 것인지는 므리바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므리바 사건은 출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광야는 그 환경이 이스라엘이 노예로 생활하던 애굽보다 더 열악했습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물이었습니다. 인간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곧 생존 문제에 큰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생존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 같은 환경으로 인도한 것에 대해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 때문에 원망을 하게 된 일은 모두 두 번입니다. 첫 번째는 마라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기서는 물이 있었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아져 마시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일인데 거기에는 아예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시 모세와 다투게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위를 치자 물이 솟은 것입니다. 그곳이 맛사, 또는 므리바로 불리는 곳입니다. 여호와를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출 17:7절을 보면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시험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계신가 안계신가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세상의 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고, 인간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도하신 바를 따라 가는 것이 백성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좋은 환경만 주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환경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환경은 생존을 편하게 해줍니다. 걱정과 염려보다는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염려와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와 걱정과 불안감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뜻을 가지고 나를 지으시고 부르셨으며 나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관계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염려와 걱정과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완악한 마음이고 불신앙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안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한 분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기르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양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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