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2.12.30 10:22

(100강) 심판의 하나님

조회 수 357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시 96:1-13http://onlycross.net/videos/psa/psa-9601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4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10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13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설교>

 

본문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해야 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무한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계시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내시고 보여주신 것만큼 하나님을 인식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식은 우리의 개념과 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감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믿음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있었고, 2절에서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저자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또한 단순히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세상이 내세우고 있는 모든 신들 가운데서 하나님만이 경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와 원칙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안에서 분명한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말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내용이 없이 위대하시다, 영광을 돌린다, 찬양한다, 경외한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은 형식일 뿐이고 따라서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새 노래로 노래하라는 말은 기존의 노래와는 단절된 다른 노래를 뜻합니다. 즉 기존에 행했던 이스라엘의 찬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기존의 이스라엘의 찬양 방식이나 형식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새롭게 수정하라는 의미로 ‘새 노래로 노래하라’고 권면하는 것일까요?

 

저자가 ‘새 노래’라는 말을 하는 것은 기존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스라엘 자체를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어떤 형식이나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인식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여호와의 성소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소로부터 여호와의 존귀와 위엄이 나타나고 능력과 아름다움도 성소에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편 저자에게 여호와의 성소는 영호와의 영광 자체였고 아주 특별한 곳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용서가 베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있는 그곳이 바로 여호와의 성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전 자체를 절대적인 장소로 여겼습니다. 성전에 성소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전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으로 절대적이고 거룩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저자가 말한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은 성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를 정결한 제물의 대신 죽음과 그 피를 보시고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라는 기이한 행적이 흘러나오는 그곳이 바로 성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이 거룩하고 절대적인 곳으로 여기는 성전에서 제사하고 찬양합니다. 또한 그들의 규례를 따라서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들고 성소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생명이 없는 형식으로 간주될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기존의 찬양은 찬양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노래하는 신자가 필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여호와께 노래하는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구원은 심판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이 없는 것처럼 심판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만약 누구든 심판은 묵과 한 채 구원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입에 단 것만을 삼키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땅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땅의 심판을 자각하면서 하늘의 의를 기다리고 소망하였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심판이라는 자신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것이고, 의로 오신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한 구원의 방식을 기이한 행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찬양이며 새 노래입니다.

 

 

현대 교회도 찬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 형편에 따라 여러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에 힘을 씁니다. 찬양을 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감정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 받은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것이 찬양의 은혜라면 아무런 악기도 없이 곡조나 박자도 맞지 않는 시골 교회 노인들의 찬양은 소음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찬양의 중요성은 분위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열정에 있는 것도 아니며 가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가사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적으로 일치된 훌륭한 가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담고 있는 구원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들끼리 노래하면서 자신의 기분을 푸는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그들이 부름 받고 존재하는 이유였습니다. 출애굽과 홍해 사건이라는 기적을 경험했으면서도 결국 먹고 마시는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었습니다.

 

 

기적 자체가 기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택한 백성을 사백년이 넘게 노예 생활을 하도록 허락하신 일이 기이하고, 열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이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선포해야 하는 것은 기적에 대한 체험이나 세상 것이 주어진 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신분으로 죄 아래 있고, 심판에 속한 자로 존재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십자가 구원이야 말로 신자인 우리가 선포해야 할 기이한 행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알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 노래를 부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부르셨고,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이 마땅한 존재였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이한 행적으로 다가오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 시편 (81강) 하나님에 대한 기억 신윤식 2012.07.29 4873
74 시편 (82강) 기이한 사적 신윤식 2012.08.05 3836
73 시편 (83강) 주의 이름을 위하여 신윤식 2012.08.12 3841
72 시편 (84강) 주의 얼굴 빛 신윤식 2012.08.19 3914
71 시편 (85강) 하나님의 증언 신윤식 2012.08.26 4030
70 시편 (86강) 주의 소유 신윤식 2012.09.09 3767
69 시편 (87강) 침묵하지 마소서 신윤식 2012.09.16 3677
68 시편 (88강) 복이 있나이다 신윤식 2012.09.23 3676
67 시편 (89강) 주의 구원 신윤식 2012.09.30 3508
66 시편 (90강) 가난한 자의 기도 신윤식 2012.10.07 3728
65 시편 (91강) 거기서 났다 신윤식 2012.10.14 3541
64 시편 (92강) 숨기시는 하나님 신윤식 2012.10.21 3525
63 시편 (93강) 하나님 찬양 신윤식 2012.11.04 3635
62 시편 (94강) 죄와 인생 신윤식 2012.11.11 3984
61 시편 (95강) 하나님을 향한 신뢰 신윤식 2012.11.25 3788
60 시편 (96강) 주께서 행하신 일 신윤식 2012.12.02 3849
59 시편 (97강) 하나님의 권위 신윤식 2012.12.09 3822
58 시편 (98강) 복수하시는 하나님 신윤식 2012.12.16 4792
57 시편 (99강) 완악한 마음 신윤식 2012.12.23 3605
» 시편 (100강) 심판의 하나님 신윤식 2012.12.30 357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