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4.28 09:15

(117강) 하나님이 하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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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3: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113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설교>

 

기독교인들이 아주 흔하게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할렐루야’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할렐루야는 시편에서만 23번 언급됩니다. 시편외의 성경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약은 어떨까요?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만 4번 언급될 뿐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할렐루야라는 말은 사용하지를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왜 할렐루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많은 목사들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교인들로부터 아멘이라는 말을 유도합니다. 아마 그런 것으로 예배의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교인들이 자신의 말에 화답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면서 그러한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복음으로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를 외치고 거기에 큰 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한다고 해서 교회 되는 것도 신자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할렐루야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별 뜻 없이 사용하기보다는 그 의미를 먼저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할렐루야로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2절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하고, 3절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은 여러분께 익숙할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무엇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해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손을 들고 ‘여호와 만세’라고 외친다고 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본래 이름이 없는 분입니다. 여호와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것은 여호와라는 분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시편 저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각자 이름, 즉 고유 명칭처럼 하나님께 있는 고유 명칭을 찬양하고 높이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에서 만나시고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모세가 그들이 자신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할 것인지 묻게 되고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답하십니다.

 

 

하지만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문제이지 우리에게 있는 이름처럼 호칭에 대한 문제는 아닙니다. 즉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지 그 호칭을 알려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하는 것은, 호칭을 부르며 말로 높이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알고 그 일을 높이고 찬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로 시작된 113편을 보면 여호와가 누구시며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그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라는 존재는 영원의 세계에 속한 자이고 따라서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래부터 영원한 세계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영원한 세계, 즉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축복일 뿐입니다. 예수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 거룩한 작 되게 하셔서 영원한 세계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로 인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 일이 자기 속에 감사와 은총으로 머물게 된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3절의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는 우주 만물 전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로부터 그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하물며 영원한 세계에 속한 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며 은총이고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찬송이기에 찬송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해 감사하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하신 분이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찬양하는 것을 소극적인 태도로만 여기며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이 찬양밖에 없는가?’라고 합니다. 찬양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로써 해야 할 일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행함은 우리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높이고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 예배는 의식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기에 자신의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며 늘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 주어진 자리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고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처럼 높으신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셨다고 말합니다(5절). 하나님이 스스로를 낮추신 일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낮아지심의 의미를 안다면 낮아짐을 소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가난하고 궁핍하고 임신하지 못한 여인, 즉 약자를 세우시고 높이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감사하며 할렐루야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높아짐을 추구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친다면 그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긍휼을 알기에 낮아짐을 소원하게 되고 낮아짐을 소원하기에 땅의 것으로 높아지고자 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헛됨을 알고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것이 할렐루야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여러분의 마음에 중심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마른 뼈다귀와 같은 우리가 일으켜 세움을 받았음을 감사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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