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6.23 09:12

(123강) 여호와의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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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9:1-8http://onlycross.net/videos/psa/psa-119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설교>

 

시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수로 되어 있다는 것 외에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을 매 구절마다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2절에서는‘여호와의 증거’3절에서는 ‘주의 도’4절에서는‘주의 법도’5절에서는‘주의 율례’이렇게 176절 마지막까지 몇 구절을 제외하고 율법을 다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에게는 ‘율법’‘계명’이라는 단어보다는 ‘말씀’‘약속’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나 계명이라는 단어에서는 ‘지켜 행하는 실천’을 생각하게 되지만 말씀이나 약속이라는 단어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은혜와는 무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은혜와는 무관하게 지켜 행해야 하는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지켜 행해야 하는 규례로 주어졌다면 율법은 신자에게 무거운 짐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신자에게 기쁨도 즐거움도 은혜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77절에서 주의 법이 자신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103절에서는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달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는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늘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119편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해서 경험할 수 있는 말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율법을 행하고 지키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서 복이 있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이것만 보면 율법은 분명히 신자가 지켜 행해야 할 것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신자가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의 내용을 그대로 지켜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 의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율법의 내용에 초점을 둠으로써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율법에 대한 오해입니다.

 

 

전에도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자식의 시험 점수가 엉망일 때 아버지가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 말을 들은 자식이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 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말 그대로 집에서 나가는 것일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호통에는 자식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지 자식을 실제로 내 쫓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시편 저자가 율법을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하고 꿀보다 달다고 하는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이 꿀보다 달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말씀에 깊이 빠져 들고 말씀의 맛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의미로 더 강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보다는 교회 생활에서 누리는 재미를 더 즐기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자는 말씀이 없이는 참된 진리의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 우리도 시편 저자가 누리고 고백하는 말씀의 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1절을 보면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행위가 온전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행위가 온전한 것 자체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이 있기 때문에 행위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신앙의 길을 가게 된 것 자체를 이미 복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한다면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가 말하는 복의 의미가 어떻게 잘못되어 오해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은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는 분명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대로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행해서 복을 받은 자가 없다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율법이 드러내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방식은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적 문제는 인간의 무능력에 있습니다. 의를 이룰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자력으로는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으며 선을 이루고 복을 받는 길로도 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율법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죄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행위가 온전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인간의 실존 문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가 말한 행위의 온전은 1절의 내용에서 이해하자면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따라 행한다는 말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면 행위의 온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말합니다. 등과 빛은 어둠 속의 길을 가는 자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자신을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자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런 자신에게 말씀이 바른 길을 가도록 비춰주는 등과 빛이 된다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율법을 지켜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한다는 뜻이 아니라 유럽이 비추고 인도하는 대로 길을 바르게 제대로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행위가 온전하다는 것도 행동이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바른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길을 바르게 가는 것은 무엇이며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1,2절을 살펴보면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서로 동일하게 복 있는 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여호와를 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구합니다. 다른 뭔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자체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만이 생명이 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불의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아니면 생명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주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이 말씀 앞에서 불의를 행하지 않고 온전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불의는 여호와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며 여호와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모, 즉 사람의 행위에는 하나님이 받아주실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인해서 여호와가 생명이심을 알게 되고, 여호와의 인자가 나에게 구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다’(72절)는 고백을 하게 되고 주의 말씀을 꿀보다 달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길을 주의 증거들로 향하여 돌이키게 합니다(59절). 오늘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주의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영혼이 사는 길임을 알았기에 이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즐거워 하게 되고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56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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