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6.30 10:01

(124강) 속이는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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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0:1-7http://onlycross.net/videos/psa/psa-120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설교>

 

 

신자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질병으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사람은 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사업이 부도 위기에 있는 사람은 부도 위기가 잘 해결되기 위해서, 자식이 속을 썩이는 사람은 자식이 속을 썩이지 않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자식 문제로 속 썩고 있는 사람이 현재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병 고침을 위해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 것입니다. 병 고침은 현재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는 내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시편 저자의 처지는 뭔지는 모르지만 환난 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의 내용에 심적으로 공감할 수 있으려면 그의 처지 역시 환난 중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 스스로를 환난 가운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절의 내용부터 공감되지 않은 채 성경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편 저자는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단지 ‘하나님은 환난이 있을 때 부르짖으면 들으시는 분이다’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말씀으로 인한 은혜는 없습니다. 만약 성경의 내용에 심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현재와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 은혜는 말씀을 깨달음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자기 주관적인, 그저 자신이 느낌과 감정적인 움직임을 은혜로 곡해한 수준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자의 찬송에 공감하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가 처한 처지를 이해하며 그의 처지에서 오늘 우리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처한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일치됨을 통해서 공감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자가 처한 현실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환난 중에 있음을 말할 뿐이지 어떤 환난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괴롭히는 사람으로 인한 문제인지,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 돈이 없어서 멸시를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2절에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가 처한 환난은 거짓된 입술, 속이는 혀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저자의 환난은 사기, 아첨, 모략, 중상과 같은 인간의 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횡포를 일삼게 되는 것은 오직 권력과 힘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힘을 얻기 위해서 사기와 아첨과 모략과 중상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신자는 권력과 힘을 지향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무시하고 허황된 것으로 간주하는 생명을 지향하는 자로 존재합니다. 이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환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환난이 아닙니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감으로 인해 겪게 되는 또 다른 고통이고 환난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다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이고 환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길을 가는 신자에게 화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는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거짓된 입술, 속이는 혀를 자기의 길로 삼게 되는 것은 결과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결과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수단과 과정이야 어떻든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이러한 방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합니다.

 

 

현대 교회가 지향하는 좋은 결과는 교회 부흥입니다. 앞뒤 살피지 않고 교회 부흥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회 부흥만 이루었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했다고 해도 정당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부흥을 위해서라면 못할 말이 없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인간의 말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된 입술, 속이는 혀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만 마음을 두고 복음을 추구한다면 과연 세상 방식과 가치관으로부터 호응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반발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머물고 있는 세상의 형편이고 현실입니다.

 

 

신자의 삶의 토대는 말씀입니다. 세상 권력과 힘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말씀에만 마음을 둘 뿐 권력과 힘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의 방식 또한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좇기 위해 힘쓰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세상에 집착한 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권력과 힘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그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 속에는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알게 된 신자가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평안은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을 내려놓게 됨으로 가능하며 이 평안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고 말합니다. 속이는 혀, 즉 거짓말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거짓말로 자신을 지키고 자기 유익을 꾀하지만 저자는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로 돌아올 뿐임을 말합니다.

 

 

거짓말이 날카로운 화살로 돌아온다면 결국 자신을 죽이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로뎀 나무의 숯불은 당시 로뎀 나무는 숯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재료라고 합니다. 숯은 겉으로는 약한 불이라고 해도 꺼지지 않고 점차 타들어 가며 결국 재로 남게 됩니다. 이것 또한 거짓말하는 자의 결과입니다.

 

 

5절에서는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라는 말을 합니다. 메섹은 야벳 자손이고 게달은 이스마엘의 자손입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족속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세상의 힘입니다.

 

 

저자는 이들과 함께 머무는 것을 자신에게 화라고 말합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환난은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의 힘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거주하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의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는 말씀처럼 그들과의 화평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늘 이기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자의 말에서 세상의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세상 현실을 실감하십니까? 그러면 이러한 현실과 환난에서 건짐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결국이 어떠한가를 알고 참된 생명에 온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고 말하지만 여호와의 응답이 저자가 처한 환경을 바꿔주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로 인해 신자의 환경이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지금 세상은 달라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건져 달라는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건져달라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믿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세상에서 떠나게 하고 믿는 자만 남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실까요?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건지시기 위해 하시는 일은 우리를 믿음 위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하시고 생명에 마음을 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방식에서는 진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평안에 거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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