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7.14 10:15

(126강) 예루살렘의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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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2: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122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설교>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구약에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수많은 규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례대로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산다고 해도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아야 하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걷든지 아니면 낙타를 타는 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며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도 필요했습니다. 그 제물이 지금처럼 화폐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짐승으로 바쳐야 했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처럼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일 년에 세 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로 규정하셨습니다.

 

 

만약 지금의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너무 번거롭고 힘들다며 믿음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지금의 유대인들도 구약의 방식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암암리에 인간의 편리를 따라 흘러가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형식만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구약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하는 날이 이르면 여러 날을 걸어야 하는 고생을 생각하면서 불평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게 고생을 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해도 그로 인해 복을 받고 형편이나 환경이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명하신 날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날이 가까워지면 또 다시 힘든 여정을 나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저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날이 되어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 즉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말이 시편 저자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감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편 저자의 기쁨과 감격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성전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약 시대의 성전이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건재하고 지성소와 법궤 또한 보존되어 있다면 예루살렘에 대한 반응은 다를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실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상상에 의한 느낌일 뿐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건물에 존재하시거나 법궤와 같은 물품에 깃들어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6,7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경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평화가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해야 할 중요한 신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자가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서 경험한 평화를 어떻게 배우고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평화는 대립과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화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부터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자는 어떤 평화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전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불화를 전제로 하는 단어이고, 세상에서 불화의 첫 근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 관계이며, 이 관계의 해결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에 있게 된 원인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들끼리 잘 어울린다고 해서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평화는 죄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가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생명에서 단절되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우리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가 평화의 관계로 바뀌어야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증거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성전입니다. 따라서 시편 저자가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서 경험한 평화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고 참된 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핵심이라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늘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형통하게 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저자가 말한 형통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한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죄의 삯인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 곧 형통인 것입니다. 이러한 형통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인간의 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죄를 무시한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연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결국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게 됩니다. 자기 행위를 앞세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의 평안과 잘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평안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평안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로 인도 받음으로 나의 죄가 용서 받음을 알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평화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구와도 동일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 자신의 되어짐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상태는 감사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주를 믿게 하시고 생명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감사함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편 저자가 경험한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과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자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죄가 용서되고 사망에서 건짐 받고 생명에 거하게 된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안정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을 찾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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