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7.28 10:13

(127강) 멸시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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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3:1-4http://onlycross.net/videos/psa/psa-123010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설교>

 

신자인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고 매일의 삶에서 은혜를 실감하고 경험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은혜를 잊고 삽니다. 오히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적다는 이유로 불만만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은혜에서 단절되었을 때의 결과를 앎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저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주’로 일컫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현대인의 사고와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을 하늘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의미를 공간적이고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하늘이라는 공간, 즉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자는 하늘을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주로 일컬으면서 눈을 들어 주께 향하고 주로부터 은혜가 베풀어지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할 것은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자기 몸을 기준하여 생각합니다. 몸이 잘되는 것을 은혜로 이해하고 그 은혜를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기도를 하면서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외치는 것도 실상은 ‘주여 내 몸이 잘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라고 말하고, 4절에서도“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누군가로부터 멸시를 받는 처지에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멸시에서 건져 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자가 겪고 있는 멸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생각하면 돈이 없고 힘이 없음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멸시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멸시에서 건짐 받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의미의 은혜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의 은혜를 구하고 기다리는 것일까요? 이것은 123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점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즉 성전은 단순히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건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면 은혜는 성전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멋대로 내가 원하는 것, 내게 좋은 것을 끌어 다가 은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은혜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 말고 우리의 영혼에 생명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참된 은혜임을 성전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주로 일컫는 것도 은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는 분명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것이 참된 은혜이며 시편 저자는 바로 그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저자의 마음은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절)는 고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은혜를 기다리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과 상전의 관계로 얘기합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눈 같다는 것은 상전의 지시와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종의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의 운명은 상전에게 달려 있습니다. 상전의 결정이 곧 종에게는 평생의 운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상전의 지시와 결정에 민감한 관심을 보이는 종의 눈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 베푸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저자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운명, 즉 자신의 전부로 여긴다면 은혜에 대해 참으로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그러한 심정인지가 문제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야 없어도 산다’는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대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구하는 은혜는 멸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가 겪는 심한 멸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일로 인한 멸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해 볼 문제는 123편의 내용을 보면 저자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는데 왜 심판 멸시를 당하는 환경에 처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늘 부딪히고 우리를 흔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대개 생각하는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멸시를 당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세상의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상황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저자를 멸시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멸시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바로 나라는 존재는 멸시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멸시 받는 자리에서 멸시 받는 것이 마땅함을 알게 된 신자가 구하게 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2절을 다시 보면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전 성경인 개혁한글판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3절 역시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은혜나 긍휼이나 같은 의미의 말이지만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은혜보다는 긍휼이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멸시의 자리에서 구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종은 멸시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또한 종은 자신의 종의 신분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종이 상전에게 구하는 것은 다만 자신을 불쌍히 생각하고 긍휼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신자입니다.

 

 

멸시 받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을 이겨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고 은혜 만능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든 좋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짐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긍휼이 곧 생명의 능력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형편에 처해진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일로 바라보면서 더 좋은 형편으로 나아기를 원하기보다는 늘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영혼이 건짐 받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형편을 누린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자일뿐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 두기보다는 하나님과 굳건한 관계에 머물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영혼을 건질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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